소설독본

lofi4 2025. 1. 13. 15:32

 

 

 

미행
미시마 유키오
2024.11.16


 

문장독본을 읽은 후에 궁금해져서 산 소설독본입니다. 미시마 유키오가 품었던 소설에 대한 생각, 이론, 이상향에 대한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문장독본보다 훨씬 난해하게 느껴졌습니다. 전공이 아닌 다른 학부의 전공서적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는 소설을 범죄와 일상 사이, 처벌받지 않는 어딘가에서 인간의 심리를 실험하고 체험하게 하는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금각사와 가면의 고백에서 그 자신이 쓴 것처럼, 심중에 숨겨진 비윤리적 욕망을 소설이란 형식으로 실현하는 작업이라 이야기하지요.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도 그렇고, 미시마 유키오도 그렇고, 폴 오스터도 그렇고, 많은 소설가들이 말하는 '소설가가 되기 위한 자질'에는 공통사항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나 직업적인 매력에 이끌려서 소설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소설가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소설가가 된다는 것이지요. 

여러 지면에 실었던 글을 한 번에 묶은 글이라 그런지, 미시마의 소설에 대한 관점도 일관되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우연이 완전히 배제되어 대차대조표처럼 완벽한 균형이 넘쳐나는 소설을 바라는 염원과, 소설은 어떻게 설계하고 계획해도 처음 생각했던 대로는 나아갈 수 없다는 말이 동시에 담겨있지요. 

여러모로 어렵긴 하지만, 소설가를 지향한다거나 창작자를 염두에 두고 있다면 읽을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200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난이도가 높은 편입니다. 좋은 문장들이 많습니다.

 


밑줄그은 문장

 


일본에서 작가로 사는 것은 결코 어떤 사람들이 동경하듯 즐겁지도 풍요롭지도 않다. 소설가는 마라톤 선수처럼 체력을 최고도로 소모하는데, 휴식도 주어지지 않고, 또 느긋하게 책을 읽고 공부하는 시간도 충분히 주어지지 않은 채,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멍하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전혀 없이, 마치 식탐 많은 아이가 엄마가 집에 안 계실 대 부엌 선반 구석구석까지 과자를 찾아다니듯, 자신의 내부에서 퍼낼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러모아 소설을 만들어 내야 한다. 

발자크는 매일 열여덟 시간씩 소설을 썼다. 사실 소설이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쓰는 것이다. 시처럼 멍하니 영감이 오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다. 이 꾸준하고 끊임없는 노력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소설가로서의 첫째 조건이며, 이런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은 예술가나 실업가나 정치가도 다르지 않다. 게으름뱅이는 어디서든 성공하지 못한다. 

무엇을 위해 쓰는가, 소설가는 자주 이런 질문을 받는다. 새를 보고 무엇을 위해 노래하고, 꽃을 보고 무엇을 위해 피느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데, 소설가에게는 항상 이런 질문이 기다린다. 그건 소설은 노래처럼 맑게 들리지 않고 꽃처럼 아름답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항상 뭔가 어두운 ‘목적’을 내포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려진 것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있고, 소설 속 사물의 모습은 아무 환상 없이 사물로 인정할 수 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다른 예술에 비해 언어예술이 지닌 탁월한 특징인데, 소설은 불행하게도 이 특징을 스스로 잊어버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문제를 정리하자. 일본어에서는 추상어 자체에 생활 전통과 배경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오히려 대화에서 추상어를 남발하면(논쟁에는 추상어 사용이 불가피하다), 풍자 효과를 노린다면 모를까, 그럴 의도가 없더라도 대화만으로 근대 도시에 사는 불안한 지식인 같은 전형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유령이 우리의 현실 세계의 물리법칙에 따라 단순한 무기물에 불과한 숯 바구니에 물리적 힘을 가해버린 이상, 모든 것이 주관에서 비롯됐다는 한때의 위안은 이미 허용되지 않는다. 이렇게 유령의 실제는 증명된 것이다. 
그 원인은 어디까지나 숲 바구니의 회전이다. 숯 바구니가 ‘빙글빙글’돌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숲 바구니는 말하자면 현실이 전위되는 경첩같은 것이라, 이 경첩이 없으면 우리는 고작 ‘현실과 초현실의 병존 상태’까지밖에 도달할 수 없다. 그보다 앞으로 다시 한 발 나아가려면 무조건 숯 바구니가 돌아야 했던 것이다. 

내가 소설이라 부르는 것은 이런 것이다. 소설이 원래 ‘그럴듯함’의 필요에서 나온 장르인 이상, 거기에는 이러한 현실을 두흔듦으로써 유령(즉 언어)을 현실화하는 근원적인 힘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힘은 장황한 서술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이런 한 줄에 압축되어 있으면 충분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범죄는 그 독특한 반짝임과 독특한 꺼림직함으로, 우리의 일상생활을 살얼음 위에 올려놓는 작용을 한다. 그것은 암묵적 약속의 파기이며, 그 강렬한 반사회성으로 인해 오히려 사회의 초상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성공한 범죄소설은 작가가 현실 또는 가상의 범죄로부터 범죄 특유의 특권적인 반짝임을 훌륭히 훔쳐냄으로써 성공한 게 아닐까. 범인 자신은 그 반짝이는 빛을 발한 대신에 형을 받고 죽어야 했지만, 소설가는 살아서 그 반짝임을 자신의 작품의 월계관으로 삼는 것은 아닐까. 

광인의 자살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즉, 광기가 자기물질화를 달성할 수 있는데, 죽음을 통해 더욱 그 달성을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광인의 살인은 반사회성 때문에 언뜻 보아 사회와 대립 관계에 있는 것 같지만, 법에서도 역시 책임능력을 면제하듯이, 엄밀한 일대일의 대립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미치광이에게 칼을 준 격’ 이라는 말이 있는데, 광인에게 살해당한 인간은 사회적 용어에 따르면 ‘사고사’인 셈이다. 

왜냐하면 우발성이란 ’사물‘의 특질이기 떄문이다. 이것을 종교 용어로 말하면 우연성이란 ’신‘의 본질일 것이다. 즉 인간적 필연을 초월한 곳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바로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인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은 일종의 사회계약에 따라 우리 자신의 살인까지도 허용되지 않게 정했기 때문인데, 광기는 어디까지나 병의 일종이고, 인간의 자유의지와는 관계가 없으므로, 아무리 관기가 위험해도 우리 자신이 발광하는 것은 허용된다. 

재료는 아무 데나 굴러다닌다. 다만 어느 시점의 나의 내적 욕구에 딱 맞는 재료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 소설가는 회중전등을 손에 들고 어두운 길을 더듬으며 걷는 사람 같은 존재다. 어느 때 길 위의 맥주병 조각이 회중전등이 빛을 받아 강하게 빛난다. 그 순간 나는 재료와 함께 주제를 발견한 것이다. 

그때의 내가 받는 인상은 미지의 장소이기 떄문에 신선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인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명백한 이치인데, 소설은 신선한 인상과 무뎌진 생활 감각을 어떻게든 잘 이어 붙이고 배합시켜서 거기에 현실보다도 강렬한 션실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 두 가지 균형이 잘 잡혔을 때 소설은 현실성을 획득한다. 

쉽게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무수한 함정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순수한 작가는 여지없이 먼 길을 돌아야 한다. 심지어 누구보다도 멀리, 가장 멀리 돌아가는 길을. 따라서 순수한 작가의 방법론은 불순물덩어리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순수함은 가짜이다. 하나의 순수함을 위해 천의 순수함이 희생되어야 한다. 

그래도 예술이라는 떡이 더욱 골치 아픈 점은 불이 두려워서 하얗게 부풀게 굽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여 흠칫거리면서 제대로 눌은 자국도 만들지 않고 꺼내 버린 떡은, 세상의 미온적이고 양식 있는 사람들로부터 위선적인 갈채를 받을지 몰라도, 결국 전율적인 걸작이 될 기회를 놓쳐버린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