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쓸 것, 뭐라도 쓸 것

lofi4 2025. 1. 25. 10:11

 

 

북트리거
금정연
2024.11.13

 


1.
서평가 금정연 작가의 일기입니다. 그날 그날의 고뇌, 딸 나연이와 주고받은 말, 글쓰는 일의 어려움, 다른 작가들의 일기에 대한 감상이 담겨있습니다. 가볍게 읽기 좋습니다. 자신의 저서 후기에 달린 악플을 읽고 의기소침해지는 모습이나, 글을 써야한다는 생각만 하다가 쓰지 못하는 모습이 짠합니다. 전반적으로 문장이 가볍고 유머러스합니다.

2.
남의 일기를 읽는 건 왜 즐거운 걸까요? 일기는 대개 소소하고, 다른 이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일상의 조각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기들을 쭉 읽어나가다보면 카페에서 단 둘이 앉아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남에게는 하지 않는 사소한 이야기나 눌러둔 감정들을 낱낱하게 드러내는 담소지요. 그 속에서 느껴지는 소소한 일상의 공감이 따스합니다. 

3.
작가는 가득 찬 일상을 보냅니다. 가족을 돌보고, 새벽까지 일하고, 마감을 몇 개씩이나 해내지요. 마감이 겹치는 일은 무지막지한 압박이 될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든 해내며 살아가는 게 신기하고 대단합니다. 제가 그런 상황이라면 압박감에 짓눌려 의기소침해진 채, 보내라는 원고는 못보내고 죄송하다는 메일이나 보내게 될 것 같습니다.

4.
 일기를 타인에게 공개하는 이유는 뭘까요? 벌거벗은 속내를 세상에 내보이고 싶어하는 정신적인 노출증? 아니면 자신의 일상이 남들에게도 의미가 있다고 믿는 나르시시스트? 구독과 좋아요와 댓글을 받아 공허한 마음을 채우고 싶어하는 관심병 환자? 저도 과거에 일기를 써서 남들에게 보여주곤 했었는데, 그렇게 했던 이유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읽는 입장에서는 분명 즐겁긴 한데, 써서 그것을 굳이 남들에게 보여주는 이유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제게는 일기라는 글은 남들에게 보여줘선 안되는 비밀이라는 인상이 짙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튼, 한동안 베게맡에 두고 읽었습니다. 소소하게 재밌었습니다.

 


밑줄그은 문장

 

턴테이블을 선물받았는데 새로운 턴테이블을 산다고? 이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눈치챘어야 한다. 하지만 깨달음은 언제나 나중에 온다. 그리고 그땐 이미 늦다. 

문득 지금보다 어렸을 때, 시간과 체력과 의욕이 더 많았을 때 이런 앱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근데 또 모르지, 오히려 시간도 체력도 의욕도 떨어진 지금이라서 이렇게 할 수 있는 건지도. 그때는 체력과 의욕이 너무 많아서 어느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거했다 저거 했다 하면서 공연히 시간만 보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아무 의미 없이 흘려보낸 것만 같은 시간과 경험이라도 지금의 내가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는 생각. 말하자면 모든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거웠던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진다. 

글을 쓰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있을 때 글을 쓰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있는 다른 작가의 일기를 읽으면 괴로움은 두 배가 된다. 

만약 작은 요정이 나타나 세 가지 소원을 말하라고 하면 나도 모르게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잠이나 자고 싶다고 했다가 곧바로 아니, 방금 건 취소해 주세요, 라고 두 번째 소원을 써 버린 다음, 입이 방정이지, 입이 방정이야! 내가 정말 말을 말아야지 정말, 이라고 했다가 요정이 그걸 세 번째 소원으로 들어줘서 영영 말을 못하게 될 것 같은 날들이다. 한마디로, 너무 피곤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물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 때문에 내가.
황정은, 일기, 창비.2021

어제도 새벽 네 시 넘어서 잤다. 글을 쓰다가? 아니 글을 써야한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다가.

잘은 몰라도 이런 게 아닐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는 여전히 나고 다른 사람이 될 수 없고 때때로 그게 너무 답답하고 절망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조금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고. 아무리 답이 없는 것 같은 순간이라도 어떤 종류의 답은 있게 마련이라고, 비록 그게 내가 바라거나 원했던 답은 아닐지라도. 

고독이 하나의 도전이며 그 안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내게는 사람들과, 심지어 사랑하는 한 사람과도 얼마만큼의 시간이든 고독 없이 함께 지낸다는 것은 훨씬 더 안좋은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내 중심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흐트러지고, 조각나서 흩뿌려져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어떠한 사건이든 그것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고, 그것의 즙액을, 그 에센스를 추출해내고, 그 결과로서 정말로 내게 일어난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메이 사튼, 혼자 산다는 것, 최승자 옮김, 까치, 1999

글을 쓸 땐 미끄러져 나가는 기분으로 써야 한다. 말들은 절뚝거리고 고르지 못할 수도 있지만, 미끄러져 나가기만 한다면 문득 그 어떤 즐거움이 모든 걸 환히 비추게 된다. 조심조심 글을 쓰는 건 죽음과 같은 글쓰기다. 
-찰스 부카우스키,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모멘토, 설준규 옮김, 2015

네가 지금 가진 것에서, 계속 꿈지럭대고 뚝딱거리는 것에서 충만함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너는 때로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겠지. 이제 더는 못 하겠어, 좀 앉아야겠어. 그래야 하면, 그래야 하는 거다. 어쩌면 너는 그걸 해낼지도 몰라, 크리스토프. 애를 써 봐, 그리고 마음 단단히 먹어. 어디서나 뚝딱거리고들 있으니, 너도 아이처럼 그냥 계속 뚝딱거려 봐. 그것만 해도 어디야. 그것만으로도 이미 멋져.
-크리스토프 쉴링엔지프, 천국도 이곳만큼 좋을 수는 없다!, 이재금-이준서 옮김, 앨피, 2023

아찔하다기보다는 막막한, 비명이 터져나오기보다는 잇새로 작은 신음이 새어 나오는, 어떤 거대한 체념과도 닮은 그런 기분. 다시 생각하니 그건 일이 잔뜩 밀렸는데 도저히 제 시간에 해낼 길이 없을 때 느끼는 기분과 닮았다. 다시 말해, 나는 늘 그런 기분이라는 거다...

그런데 왜 나는 계속 낯모르는 타인들의 일기를 읽으며 내 일기를 남들에게 보여주는 걸까? 마치 세상이 나를 잘 알고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배우고 욕망하고 느끼고 행동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물론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