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깊이에의 강요
한 젊은 여성 예술가가 평론가로부터 '당신에게는 재능이 있지만 깊이가 없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 평가는 그녀에게 깊이에 대한 강요를 느끼게 만들고, 결국 그 집착은 그녀를 망가뜨려 자살에 이르게 만들지요. 그녀의 죽음 앞에서 평론가는 안타까움을 표현하면서도, 그녀의 비극은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었으며 그 깊이에 대한 강요는 사실 그녀의 초기작에서부터 이미 내재되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인생에서 '깊이'를 추구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건 상처로만 증명할 수 있는 것일까요?
2. 승부
젊은 청년이 노련한 체스 고수 장에게 도전하는 이야기입니다. 구경꾼 모두가 젊은이의 승리를 바라지요. 장은 확실히 고수이지만 그의 체스엔 특별한 매력이 없고, 가끔은 비열함마저 보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젊은이는 아직 미숙해보이기도 하지만, 젊음이 가진 아우라와 카리스마가 빛납니다. 그는 구경꾼들이 쉽게 읽지 못하는 기묘한 수를 던지며 게임을 끌고가지요. 그러나 그는 무모한 수를 둔 끝에 패배합니다.
늙은 장은 체스판을 들고 돌아가면서, 사실 자신도 내심 젊은이가 이기기를 바랐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체스를 두는 내내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이미 상대를 우위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지요. 게임에서는 이겼음에도, 그 사실이 자신을 패배자로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장은 체스를 그만두기로 합니다.
3. 장인 뮈사르의 유언
금세공사 뮈사르가 남긴 세계의 진리에 대한 편지입니다. 그는 세상이 돌조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종말이 오면 우리 모두가 거대한 조개에게 삼켜질 것이라고 예언하지요. 뮈사르는 계곡 깊은 곳, 장미화단 아래, 산 정상에서 돌로 된 조개를 발견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 어디를 파도 돌조개가 나올 것이라고 결론짓고, 세상은 돌조개로 이루어져 있다고 확신하게 된 것이지요.
저도 이런 편향적인 판단을 종종 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외로움을 보고, 저기서도 외로움을 느끼며 돌아다니다보면, 결국 인생이란 고독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거든요. 그게 전부는 아닐텐데.
4. 문학의 건망증
문학적 건망증에 대한 흥미로운 논의. 화자는 어떤 책을 읽어도 시간이 지나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건망증 때문이라기보단, 그 책이 우리의 내면에 깊숙이 스며들어 우리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내용이 너무도 평범하고 당연한 것이 되어서 잊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마치 안경을 너무 오랫동안 쓰고 있다보면 안경이 내 코 위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전반적으로 짧은 단편들로 이루어진 얇은 책이라 부담스럽지 않았고, 각 이야기가 던지는 질문들이 재밌었습니다.
밑줄그은 문장
그러나 혹시-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해 이렇게 생각해 본다-(인생에서처럼) 책을 읽을 때에도 인생 항로의 변경이나 돌연한 변화가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도 있다. 의식 깊이 빨려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화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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