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스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2024.09.29
광기와 신경증의 서사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모든 인물들이 점차 광기와 신경증에 휘말려 들어갑니다. 아버지 표토르는 시작부터 모멸을 견디지 못해 모멸 속으로 뛰어드는 인물이고, 첫째 드미트리는 고결한 면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충동적이며, 둘째 이반은 똑똑하지만 오만하지요.
셋째 알료샤는 새하얀 비둘기같은 중재자처럼 등장하지만, 그의 판단과 행동들은 지나치게 초월적으로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작중 주요 인물중에서 가장 어리지만 가장 성숙합니다. 그래서 알료샤는 인물이라기보단 신앙의 상징처럼 보였습니다.
그의 입체성을 드러내는 부분이 리자와의 사랑이나 조시마 장로의 장례식에서 충격을 받는 부분인 것 같은데, 리자의 비중이 적고 조시마 장로의 장례식에서 받은 충격에서 깨어나는 시간이 너무 짧아 제겐 여전히 알료샤가 인물보단 상징처럼 보였습니다.
끝없는 욕망과 비극적 귀결
소설의 중심에는 드미트리와 이반, 알료샤, 그리고 스메르댜코프가 있습니다. 드미트리는 욕망에 사로잡혀 짐승 같은 행동을 일삼고, 이반은 이성의 이름으로 신과 선악의 경계를 허물며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운명은 결국 파멸로 치닫습니다. 드미트리는 짐승 같은 면모를 다스리지 못하고 폭풍 같은 사건에 휘말리며, 이반은 스메르댜코프에게 완전히 무너져 광기에 사로잡힙니다.
스메르댜코프는 '무엇이든 가능하다'라는 이반의 말에 심취해 그걸 몸소 실행합니다. 주관 없이 이반의 생각을 받아들여 그것을 왜곡시키고, 행동으로 저지르지요. 그러나 사상을 성실하게 따르고 행동에 심취할 뿐,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 모습에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떠올랐습니다.
대심문관 이야기
이반이 알료샤에게 들려준 '대심문관' 이야기가 이 이야기의 핵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늙은 대심문관은 재림한 예수를 잡아 가두고 말합니다. 예수가 인류에게 준 자유가 오히려 그들을 고통스럽게 만들며, 사람들이 바라는 건 자유가 아니라 안정과 자신을 지배할 권위라고 말하지요. 그는 교회가 예수의 가르침을 대체하여 사람들에게 자유를 빼앗음으로써 안락함을 제공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다음 날 화형시키겠다고 말하지요.
하지만 예수는 이 위협과 궤변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그러다 마지막에, 반박하는 말 대신 대심문관에게 입맞춤을 하지요. 이 입맞춤이 대심문관에게 큰 충격을 주어 결국 대심문관은 예수를 감옥에서 풀어주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이반이 이 이야기를 만든 의도는 신앙을 공격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야기의 결말은 대심문관의 논리의 승리가 아니라 예수의 입맞춤과 용서로 끝나지요. 의심과 지적인 오만에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반이 속에 숨겨진 기독교적 가치관과 신앙을 드러내는 고백처럼 보였고, 그 모순이 재미있었습니다.
예수의 입맞춤은 신앙과 사랑의 힘이야말로 인간의 불완전함을 넘어서는 길이라는 작가의 메시지를 담고 있지요. 이 메시지는 에필로그, 일류샤의 장례식에서 알료샤가 아이들에게 하는 연설까지 이어집니다.
총평
굉장히 두껍고 등장하는 인물도 많고 이름도 헷갈려서 쉽지 않았지만,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