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2024.06.10
몇년 전, 중고서점에서 구매해 책장에 넣어두었습니다. 왠지모르게 손이 가질 않아서 책장 깊숙한 곳에 박아놓았었지요. 그러다 최근에 책장정리를 하다가 꺼내서 읽게 되었습니다.
롤리타 콤플렉스의 어원이 된 소설인 만큼, 소아성애를 다룬다는 면에서 꺼림찍한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소아성애를 다룬 소설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훨씬 복잡한 이야기가 담겨 있지요.
욕망을 억제하고 통제하는 것의 불가능성, 그리고 그 욕망을 막아서는 대신, 오히려 욕망을 보호하고 부추기는 이성을 보았습니다. 험버트는 자신의 '이상함'에 대해 자괴감을 느끼는 대신, 롤리타를 향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몰두합니다. 그가 묘사하는 열두 살 소녀에 대한 집착과 갈망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려지지요. 그 아름다운 문장들이 험버트의 질척거리는 욕망을 더욱 극적으로 증폭시키고, 징그럽게 만듭니다.
이 과정에서 험버트는 독자를 끌어들입니다. 텍스트는 영상매체나 음악과는 달리, 독자가 읽어줄때에만 시간이 흐르고 사건이 진행되지요. 험버트는 독자를 마치 공범처럼 자신의 이야기로 끌어들여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험버트는 이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하는 목적이 롤리타를 불멸로 만들기 위해서, 그의 사랑을 남기기 위해서라고 말하지요. 독자는 이 책을 읽음으로서 그의 이야기와 목적에 일조하는 것 같은 불쾌감을 갖게 됩니다.
롤리타에서 표현되는 험버트의 사랑, 그 압제적이고 터부시되는 사랑은 독자를 불쾌하게 만들고, 때로는 이것이 예술인지 통속소설인지 분간할 수 없게 만드는 지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불쾌함이 이 소설의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나보코프는 그 지점을 통해 이 소설을 예술로 만들지요.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험버트가 롤리타에게 품은 것이 단순한 비틀린 욕망인지, 아니면 사랑인지 확신할수가 없게 됩니다.
제게는 험버트가 롤리타에게 품은 것은 단순한 성욕이 아니라, 도착적이고 비틀린 형태로 빚어진 사랑처럼 보였습니다. 자신의 삶을 다 저버려도 좋을 정도로 강렬한 사랑이지요. 동시에 그 사랑은 롤리타에겐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뒤흔드는 폭력과 억압이었습니다. 이 불협화음이 소설을 읽는 내내 귓가를 긁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보코프가 자신의 모국어도 아닌 영어로 이런 소설을 써 낼 생각을 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문학적 사조나 다른 영미권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잔뜩 들어가 있고, 언어유희도 많이 쓰이지요. 게다가 주제도 상당히 아슬아슬하고요. 타국의 언어로 이런 소설을 쓸 생각을 한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다만 영어로 쓰인 언어유희를 번역본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과 등장하는 작가들이 대부분 모르는 이름이어서 알아듣지 못했던 게 아쉬웠습니다. 영어 실력이 뒷받침 된다면 원문으로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밑줄 그은 문장들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
아침에 양말 한 짝만 신고 서 있을 때 키가 4피트 10인치인 그녀는 로, 그냥 로였다. 슬랙스 차림일 때는 롤라였다. 학교에서는 돌리, 서류상의 이름은 돌로레스. 그러나 내 품에 안길때는 언제나 롤리타였다.
나는 그녀에게 정말 예쁘다는 말을 안 할 수 없었고, 그러자 그녀가 얌전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다니 참 친절하네요.”
여러분이 상상해주지 않으면 나는 존재할 수 없다.
정신적인 면에서는 역겨울 정도로 평범한 계집애였다.
어째서 나는 국외로 나가면 우리도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을까? 환경 변화란 파경을 앞둔 연인들과 죽음을 앞둔 폐병 환자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전통적 오류에 불과한 것을.
너와 내가 함께 불멸을 누리는 길은 이것뿐이구나. 나의 롤리타.
그러나 나는 교훈적인 소설은 쓰지도 않고 읽지도 않는다. 존 레이가 뭐라고 말하든 간에 롤리타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책이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나에게 소설이란 심미적 희열을, 다시 말해서 예술(호기심, 감수성, 인정미, 황홀감 등) 을 기준으로 삼는 특별한 심리상태에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에만 존재 의미가 있다.
감히 단언하건데 진지한 작가라면 누구나 자신이 발표한 책으로부터 끊임없이 위안을 받는다. 책은 마치 지하실 어딘가에 항상 켜두는 점화용 불씨와 같아서 작가의 가슴속에 있는 온도 조절기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즉시 작고 조용한 폭발이 일어나면서 친숙한 열기를 발산한다.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쇼몬 (1) | 2024.11.17 |
---|---|
나의 소소한 일상 (1) | 2024.11.16 |
Sputnik Sweetheart (스푸크니크의 연인) (1) | 2024.11.14 |
만질 수 있는 생각 (1) | 2024.11.14 |
가면의 고백 (9) | 2024.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