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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by lofi4 2024. 11. 20.

민음사

다자이 오사무

2023/09/09


 

체호프의 단편, 벚꽃 동산을 모티프로 다자이 오사무가 쓴 사양입니다. 저물어가는 해와 같이 몰락해가는 한 귀족 가정의 이야기를 쓰고 있지요. 

주인공, 장녀 가즈코는 나약합니다. 부드럽고 유순하면서도 자신의 저속한 생각에 자괴하고, 어머니를 정성껏 돌보면서도 그녀를 위해 산골에 틀어박힌 자신의 삶을 떠나고 싶어하지요. 쓸쓸하고 나약합니다.

남동생이 전쟁에서 돌아옵니다. 마약중독자가 된 그는 그녀와 어머니를 괴롭히지요. 술과 마약을 빠져 집안의 돈을 탕진합니다. 안 그래도 기울어져가는 가세에 도움을 주지 못할 망정, 오히려 더욱 불을 지르지요. 하지만 본인도 그 쾌락을 즐기지 못합니다. 어머니와 가즈코를 더욱 괴롭게 만들면서 스스로도 괴롭게 만들지요.

어머니는 우아하지만 무력합니다. 남아있는 돈을 쓰기만 할 뿐 어디서 벌어들일 수 있는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전혀 모르지요. 현실감각 없이 온실 속 화초처럼 우아하게 살아온 인물입니다. 집안 기둥까지 뽑아다 술과 마약에 써버리는 나오지를 혼내지도 못하고, 병으로 인해 서서히 죽어갑니다.

인물들은 파멸을 향해 갑니다. 자신의 나약함때문에, 강단없는 성격때문에, 거절하지 못하는 유순함때문에, 막연한 사랑때문에 점점 가난해지고 병들어갑니다. 

인간의 나약함, 저는 그것을 싫어합니다. 자존심을 이기지 못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퉁명스럽고 짜증스럽게 대하는 자신을 싫어합니다. 해야할 일을 앞두고 용기를 내지 못하는 자신을 싫어합니다. 미움받을 것이 두려워 거절의 말을 입 안에서 우물거리는 자신을 싫어합니다. 다자이의 소설에는 그런 모습이 날 것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소설에서 온갖 보기 싫은 스스로의 모습을 목격하고 말지요. 

그렇기에 그의 글을 좋아합니다. 이야기 속에 제가 있습니다. 무력하고 나약하고 한심한 제가, 그의 소설속에 있습니다. 어디에도 떳떳하게 내놓을 수 없는 제가 그 곳에 있습니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젖은 눈동자같은 축축하고 우울한 애정을 느낍니다.

저는 다자이의 작품 중 이 작품, 사양을 가장 좋아합니다. 인간실격보다도 더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결말때문인데, 여기 적는 건 여러모로 스포일러인듯 싶으니 남기지는 않겠습니다. 

여성 화자의 부드러움이 다자이의 나약함과 잘 어우러진 작품입니다. 부드러우면서도 뚜렷한 갈망이 심중에 있는 문장들이 좋았어요. 인간실격을 읽고 다자이에게 매력을 느꼈다면, 일독을 권합니다.

 


밑줄그은 문장

 

6년 전 어느 날 제 가슴에 아스라이 무지개가 걸렸고 그건 연애도 사랑도 아니었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그 무지개 빛깔은 점점 또렷해져 저는 지금껏 한 번도 그걸 놓친 적이 없습니다. 소나기가 지나간 맑은 하늘에 걸리는 무지개는 이윽고 덧없이 사라져 버리지만, 사람의 가슴에 걸린 무지개는 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세상에서 칭찬받고 존경받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이고 가짜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세상을 신용하지 않습니다. 딱지붙은 불량만이 제 편입니다. 딱지 붙은 불량. 저는 오직 그 십자가에만은 달려 죽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만인에게 비난받는다 해도, 저는 되묻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딱지 없는, 훨씬 더 위험한 불량이 아니냐고. 

기다림. 아아, 인간의 생활에는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미워하는 여러가지 감정이 있지만, 그래도 그런 건 인간생활에서 겨우 1퍼센트를 차지할 뿐인 감정이고 나머지 99퍼센트는 그저 기다리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행복의 발소리가 복도에 들리기를 이제나 저제나 가슴 저미는 그리움으로 기다리다, 텅 빈 공허감. 아아, 인간의 생활이란 얼마나 비참한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겠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이 현실. 그리고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헛되이 뭔가를 기다려요. 너무 비참해요. 태어나길 잘 했다고, 아아, 목숨을, 인간을, 세상을 기꺼워 해 보고 싶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거짓말을 믿으려 애썼다. 목숨을 앗아간다는 무시무시한 말은, 잊으려 애썼다. 나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신다는 것은 곧 내 육체도 함께 소실되고 마는 느낌이라, 도저히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깡그리 잊고 어머니에게 맛있는 음식을 듬뿍듬뿍 만들어 드려야지. 생선, 수프, 통조림, 간, 육수, 토마토, 계란, 우유, 맑은 장국, 두부가 있으면 좋으련만. 두부 된장국, 쌀밥, 맛있는 건 뭐든지, 내가 가진 물건을 몽땅 팔아 어머니에게 대접해 드려야지.

나는 어머니가 이처럼 우아하게 숨 쉬며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쁘고 고마워서,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다.

나는 어머니가 지금 행복한 게 아닐까, 하고 문득 생각했다. 행복감이란 비애의 강바닥에 가라앉아 희미하게 반짝이는 사금같은 것이 아닐까? 슬픔의 극한을 지나 아스라이 신기한 불빛을 보는 기분.

“난 모르겠어. 아는 사람이 있으려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모두 어린애야.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랑을 위해 연애를 위해 그 슬픔을 위해, 몸과 영혼을 나락으로 내던질 수 있는 사람. 아아, 나는 나 자신이야말로 그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아아, 이 사람들은 뭔가 잘못된 거야. 하지만 이 사람들도 내 사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어떡해서든 끝까지 살아야만 한다면, 이 사람들이 끝까지 살기 위한 이런 모습도 미워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살아 있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아아, 이 얼마나 버겁고 아슬아슬 숨이 넘어가는 대사업인가! 

“(…)음침한 탄식의 한숨이 사방 벽에서 들려올 떄, 자신들만의 행복따위 있을 리가 없잖아? 자신의 행복도 영광도 살아있는 동안엔 결코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노력, 그런 건 그저 굶주린 야수의 먹잇감이 될 뿐이지. 비참한 사람이 너무 많아. 거슬리나?”

누나.
내겐 희망의 지반이 없습니다. 안녕.
결국 내 죽음은 자연사입니다. 사람은 사상만으로 죽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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