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책들
파크리트 쥐스킨트
2023/07/29
소설은 두 갈래의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끊임없이 걸음을 재촉하는 좀머씨와, 자라나는 소년인 주인공의 이야기지요. 좀머씨의 발걸음은 메트로놈같은 발걸음으로 시골 마을을 정처없이 걷습니다. 소년은 키가 키가 1미터밖에 되지 않는 시절, 나무에 재빠르게 오르고 낡은 자전거를 어줍잖게 타며 성장합니다. 노란 원피스를 입은 흑발 단발머리 여학생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엄격하고 늙고 히스테릭한 퐁텐부인에게 피아노를 배우며 무섭게 혼나고, 그래서 자살하려고 나무 위에 올라갔다가 좀머씨가 멈춰서서 빵을 먹는 것을 목격하지요. 그렇게 소년은 성장하고 시간은 흐릅니다. 그 와중에도 좀머씨는 계속 계속 걸어다니고 있지요. 소년의 삶과 좀머씨의 삶은 스치듯 교차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 둘은 이야기의 구성상, 서로를 보완합니다. 소년은 좀머씨를 묘사하기 위해 필요하고, 좀머씨의 이야기는 소년의 일상이 이야기가 되기 위해 필요합니다. 소년의 성장만으로는 이야기의 중심이 없고, 좀머씨의 생활만으로는 이야기의 플롯이 없습니다. 좀머씨는 끊임없이 걸을 뿐이니까요. 그를 목격하고, 그의 이상함에 대해 서술하며, 그의 최후를 마지막으로 기록할 인물이 필요합니다. 그 둘은 서로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 필요가 없지만, 최소한 목격할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하지요.
그래서 서로 연관이 없어보이는 이야기가 씨실과 날실처럼 겹쳐지며 하나의 이야기를 만듭니다. 자그마하던 소년이 성장하는 동안 계속 도망치듯 걷는 좀머씨는 깊은 트라우마가 박혀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방인의 뫼르소가 엿보이는 것 같기도 하지요. 그 이유는 끝내 밝혀지지 않습니다. 중립국을 외치던 최인훈의 '광장'의 주인공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파크린트 쥐스킨트가 좀머씨의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소설의 분위기가 '향수'에서 엿보였던 인물들의 입체성을 좀 더 인간적인 세계에서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라 좋았습니다. 상뻬의 일러스트도 잘 어울려서 한 권의 책으로서 완성도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냥 날 좀 내버려 두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