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에밀 아자르
2023/06/18
멋진 소설입니다. 문장들은 정말 아이가 쓴 것 처럼 생동감넘치고 내용에는 깊이가 있습니다. 로자 아줌마의 죽음까지 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인생의 면모들이 다채로운 색채로, 날 것으로 쓰여집니다다. 아이들이 가질 법한 편견이나 생각들이 경계선을 넘어서며 생동감을 주지요.
모모, 롤라 아줌마, 엄마 아이샤, 하밀 할아버지, 꼬마 모세, 닐라 아줌마... 엘레베이터 없는 칠 층 건물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살았던 로자 아줌마.
저는 이 소설이 모모의 성장소설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줄거리는 모모의 성장만이 아니라, 로자 아줌마의 노화와도 얽혀있지요. 모모가 성장하는 사이에 로자 아주머니는 죽어갑니다. 그 과정은 퍽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슬픕니다.
줄거리는 서로 교차하며 밧줄처럼 단단히 얽힙니다. 모모의 생기어린 문장들은 로자 아줌마의 처연한 죽음, 그녀에 대한 사랑과 동정, 우스꽝스럽고 애처로운 이웃들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종교나 나이, 혈연따위보다 훨씬 중요한 관계가 모모와 로자아줌마 사이에 있습니다. 애달프고도 슬픈, 그러나 찬란한 사랑이 보이지요.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모모는 치매에 걸리고 못생기고 뚱뚱하고 늙고 볼품없어진 로자 아줌마를 돌보다가, 도망가기도 하고 눈살을 찌푸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모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그녀의 눈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곁에 남아주는 유일한 사람이지요.
로맹가리는 61세에 이 소설을 썼다고 합니다. 저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 다시 아이처럼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삶을 무척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밑줄 그은 문장
무서워하는 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녀를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제 목숨은 그녀에게 남아있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목숨을 소중히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생각해볼 때 그건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암만 생각해도 이상한 건, 인간 안에 붙박이장처럼 눈물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래 인간은 울게 되어있는 것이다. 인간을 만드신 분은 체면같은 게 없음이 분명하다.
하밀 할아버지는 위대한 분이었다. 다만, 주변 상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
마약주사를 맞은 녀석들은 모두 행복에 익숙해지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끝장이다. 행복이란 것은 그것이 부족할 때 더 간절해지는 법이니까.
나는 너무 행복해서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손 닿는 곳에 있을 때 바로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로자 아줌마가 개였다면, 진작 사람들이 안락사 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사람에게보다 개에게 더 친절한 탓에 사람이 고통없이 죽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열 다섯살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하다 보면 속이 상해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힘 센 경찰과 포주가 되어서 엘레베이터도 없는 칠 층 아파트에서 버려진 채 울고있는 늙은 창녀가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
“하밀 할아버지, 로자 아줌마는 이제 유태인이고 뭐고 할 것도 없어요. 그저 안 아픈 구석이 없는 할머니일 뿐이에요. 그리고 할아버지도 이제 너무 늙어서, 알라신을 생각해 줄 처지가 아니잖아요. 알라신이 할아버지를 생각해줘야 해요. 할아버지가 알라신을 보러 메카까지 갔었으니까, 이제는 알라신이 할아버지를 보러 와야 해요. 여든 다섯살에 뭐가 무서워서 결혼을 못하세요?”
그러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양탄자를 팔러 다니던 생활을 그만둔 뒤로는 매일 똑같은 생활의 반복이다보니 백지 위에 백지만 쌓아온 셈이어서 별다른 기억이 있을 리 없었다.
프랑스에서는 미성년자들을 극진히 보호한다. 너무 보호하는 나머지 보호해 줄 사람이 없는 아이들은 감옥에 처넣을 정도로.
그때만큼 아줌마를 사랑해 본 적도 없었다. 그녀는 늙고 못생겼으며 이제 곧 그녀는 더이상 살아있는 인간이 아닐테니까.
더이상 살아갈 능력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의 목구멍에 억지로 생을 처넣는 것보다 더 구역질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그 자신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더이상 아무도 신경쓸 일이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기가 받아 마땅한 몫을 돌려받게 되니까.
나는 마침내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