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테라
위대한 소설입니다. 프란츠와 사비나, 토마시와 테레사라는 네 명의 연애사를 다룬 것 같은 소설이지만, 그 내용은 사랑보다 깊은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 영혼과 육체를 현실의 관계로 펼쳐내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에서는 작가가 한 발 빠져서 관찰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면에 나서서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를 하지요. 인물들의 모티브가 무엇인지, 왜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지 나서서 설명을 합니다. 이런 방식이 독자가 인물들에 몰입하는 것을 막는다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개입 때문에 이 소설이 연애소설 이상의 깊이를 갖게 됩니다.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을 통한 존재의 고민으로 깊어지지요.
토마시는 바람둥이로 등장합니다. 유능한 외과의인 토마시는 여자들과 가볍게 하룻밤을 보내면서 그 기억을 수집하지요. 잠자리에서 엿보이는 여자들의 저마다 다른 반응에 대한 기억을 수집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존재란 가벼운 것이고, 그렇기에 그는 관계를 가볍게 생각하지요.
그런 그의 인생에 테레자가 등장합니다. 안나 까레리나를 입장권처럼 들고 그의 아파트에 들어서지요. 그녀의 존재는 무겁습니다. 토마시는 그녀와 가볍게 만날 생각으로 연락처를 주었으나, 테레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갖고 그를 찾아가지요.
그녀는 토마시가 자신을 육체가 아닌 영혼을 가진 존재로 받아들이기를 요구합니다. 토마시는 그런 그녀를 내치지 못합니다. 초반에는 그 이유가 동정심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 동정심은 사랑으로 깊어지지요.
사비나는 토마시의 가벼운 친구였습니다. 그녀는 매력적인 여성 화가입니다. 토마시와 사비나는 육체적 관계는 맺었지만 깊이 묶이지는 않은 친구지요. 그녀는 키치의 세상을 싫어합니다. 그녀의 작품 중 하나는 화폭을 찢고 그 안을 드러낸 작업입니다. 그녀는 키치가 아닌 깊이를 추구하지요. 그녀는 역사적 사건에 뛰어드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합니다. 체코가 침략당했을때 그녀는 군인들의 사진을 찍고, 그걸 외신에 실으며 기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지요. 하지만 이후 그녀가 체코를 탈출했을때 마주한 것은 전쟁 피해자로서의 역할, 깊이를 잃고 키치화된 하나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녀는 환멸을 느끼고 미국으로 떠나지요.
프란츠는 무겁습니다. 소위 엘리트 계층의 인간이지요. 그는 잘 닦인 도로같은 코스를 밟고 교수로서 자리를 잡은 인간입니다. 그는 사비나를 좋아합니다. 아니, 경외합니다. 사비나는 그와 가벼운 관계만을 맺을 뿐이었으나, 그는 그녀를 여신처럼 생각하며 사비나가 자신이 갖지 못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가 보기에 사비나는 진짜 인생에 뛰어들어서 위험을 감수하고, 목숨을 걸며 의미를 찾는 여자입니다. 그는 사비나를 향한 사랑을 확신하며 아내에게 불륜을 고백하고 이혼을 선언합니다. 하지만 그 날, 사비나는 말없이 그를 떠나지요.
사비나는 미국으로 망명합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도 그녀는 깊은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그녀는 존재의 가벼움을 버거워합니다. 그러던 중, 토마시와 테레사가 교통사고로 죽었음을 알게 되지요. 그녀는 그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녀의 관점에서 토마시와 테레사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존재의 가벼움을 떨쳐내고 진정한 사랑 속에서 죽은 것으로 여겨지지요. 그들은 사비나가 끝까지 찾지 못한 진정한 사랑을 찾습니다. 슬픔의 형식으로 쓰여진 행복을.
밀란 쿤데라의 메스같은 문장이 빛을 발합니다. 사랑을 통해 인생의 여러 면모들을 드러내지요. 난이도가 있는 책이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그 깊이가 체감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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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생각에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아틀라스가 어깨에 하늘을 지고 있듯 인간도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 여인에게 연민을 느낀다는 것은 그녀보다 넉넉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몸을 낮춰 그녀의 높이까지 내려간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런 것이어야만 한다고 상상한다. 또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도 더이상 삶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누군가를 미친듯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창자가 내는 꾸르륵 소리를 한 번 듣기만 한다면,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 과학 시대의 서정적 환상은 단번에 깨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어느날, 여전히 거울을 보다가 자신이 늙고 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성애가 희생 그 자체라면, 태어난 것은 그 무엇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죄인 셈이다.
그녀는 한 때 그녀가 과대평가했던 젊음과 아름다움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소리높혀 외치고 지나간 삶과 엄숙하게 결별하고자 철저하게 뻔뻔해졌다.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에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런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어머니가 그녀를 괴롭혔다면, 그것은 그녀가 단지 너무도 불행했기 때문이었다.
낯선 이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이상한 광기이며 그 명령을 남자가 아닌 여자가 내린다면 더욱 아름다운 광기인 것이다.
그녀의 가장 날카로운 무기는 그녀의 나약함이었다.
현기증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의 허약함에 도취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허약함을 의식하고 그의 저항하기보다는 투항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허약함에 취해 더욱 허약해지고 싶어하며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주대로에 쓰러지고 땅바닥에, 땅바닥보다 더 낮게 가라앉고 싶은 것이다.
젊은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선택의 결과가 아닌 것은 장점이나 실패로 간주될 수 없다.
그는 그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 처럼 그녀를 사랑했다.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며, 우리가 하는 그 무엇도 더이상 진실이 아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베일에 가린 법이다.-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철저한 미지의 무엇이다.
대답없는 질문이란, 그 너머로 길이 없는 하나의 바리케이트다. 달리 말해보자. 대답없는 질문들이란 바로, 인간 가능성에 한계를 표시하고 우리 존재에 경계선을 긋는 행위이다.
애교란 무엇인가? 딱히 그 실현 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지만 성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범죄적 정치 체계는 범죄자가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이 만든 것이다.
은밀한 공범자끼리 나누는 어정쩡한 웃음, 그것은 창녀촌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남자가 지을만 한 웃음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조금은 부끄러워 하지만, 동시에 그 부끄러움이 피장파장이라는 점 때문에 즐거워한다. 그들 사이에는 일종의 연대감 같은 것이 형성된다.
자아의 유일성은 다름아닌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에 숨어있다. 인간은 모든 존재에 동일한 것, 자신에게 공통적인 것만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개별적 자아’란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구별되고 따라서 미리 짐작도 계산도 할 수 없으며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베일을 벗기고 발견하고 타인으로부터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그의 경험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작가가 우회했던 경계선을 뛰어넘어 가능성을 실현한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 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광녀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 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그렇다. 죽음이란 이런 것이다. 자고 있는 테레자가 끔찍한 가위에 눌렸는데, 그는 그녀를 깨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너무 추해서 누구도 죽은 자 사이에서 부활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들은 서명을 거부한 토마시에게서 양심의 부채를 느꼈다. 그의 빈곤과 비참한 모습이 안쓰러웠고, 그래서 그를 보거나, 만나거나, 소식을 전해듣고 싶지 않았다.
토마시는 생각했다. 사랑과 섹스를 연관한 것은 창조주의 가장 괴상한 발상 중 하나다.
그것이 종교적 믿음이건 정치적 믿음이건 간에 모든 유럽인들의 믿음 이면에는 창세기의 첫번째 장이 존재하며, 이 세계는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모양으로 창조되었고, 존재는 선한 것이며 따라서 아이를 가지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거기서 유래했다. 이러한 근본적 믿음을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 라고 부르도록 하자.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 말하자면 키치란 본질적으로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문자적 의미에서나 상징적 의미에서나 그렇다. 키치는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행진 대열이 내건 묵시적 슬로건은 ‘공산주의 만세!’ 가 아니라 ‘인생 만세!’ 였다. 공산주의 정치의 힘과 모략은 이 슬로건을 독점하는 데 있었다.
가슴이 말 할 때 이성이 반박의 목청을 높히는 것은 예의에 벗어난 것이다. 키치의 왕국에서는 가슴이 독재를 행사한다. 키치는 모든 정치인, 모든 정치 행위의 미학적 이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소위 강제 수용소는 전체주의적인 키치가 자신의 오물을 버리는 정화조라고 할 수 있다.
키치는 죽음을 은폐하는 병풍이다.
키치는 거짓말로 인식되는 순간, 비-키치의 맥락에 자리잡는다. 권위를 상실한 키치는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키치를 아무리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인가? 소비사회 거부인가 생산 증대인가? 단두대인가 사형제도 폐지인가? 이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좌익 인사를 좌익 인사답게 만드는 것은 이런저런 이론이 아니라 어떤 이론이라도 대장정이라 불리는 키치 속에 통합하는 능력인 것이다.
타인의 시선 없이는 우리는 불 꺼진 무대 위의 배우처럼 외롭고 무의미한 것이다.
키치란 존재와 망각 사이에 있는 환승역이다.
-단조롭고, 평화롭고, 단단한 일상에 매몰되어버린 그의 자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고독도 가난도 버티지 못한 그의 영혼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에 짓이겨지고, 무겁고 두꺼운 타이어에 깔려 납작한 시체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인간의 참된 선의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만 순수하고 자유롭게 베풀어 질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사랑)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은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 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만 하는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번 밖에 살 수 없으며 현생과 후생을 비교하며 후생을 바로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