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밀란 쿤데라
2024.11.04
밀란 쿤데라는 샹탈과 장마르크, 두 연인을 중심으로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대답은 주어지지 않는 질문이라 상당히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저는 인간이 단일한 자아에 대한 환상을 갖고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인간이 확고불변한 중심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입장이지요. 우리는 매 순간 변화하며 장소와 관계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마음' 이나 '영혼' 이라는,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인간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쿤데라의 두 연인도 마찬가지로 정체성을 잃습니다. 샹탈의 정체성은 남자들에게서 시선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흐려지고, 샹탈의 사랑에 의존하던 장마르크의 정체성은, 장마르크가 생각하던 샹탈의 모습이 현실의 모습과 불일치하면서 흔들립니다. 이 연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외부와 세상과의 관계에 의탁시켜두었기에, 외부와의 갈등이 생기자 그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지요.
이 이야기의 중심은 샹탈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샹탈의 성욕이지요. 샹탈이 남자들에게 관심을 받지 못해 의기소침해졌기에 장마르크가 익명의 편지를 썼고, 그 정체성의 기만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간 샹탈은 기차를 타고 터널로 향합니다. 마치 성교를 묘사하는 듯한 그 기차 안에서, 여러가지 궤변을 늘어놓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유혹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가장 내밀한 성욕을 상징하는 영국인 남자의 저택이지요.
이 지점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제시했던 이론이 생각났습니다. 인간의 에너지가 성적 본능, 리비도에서 비롯된다는 이론이었지요. 마찬가지로 샹탈이라는 인물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 들어갔을 때, 그 표면 아래에 있던 것은 영국 남자로 묘사된 성적 욕망던 것 같습니다.
장마르크의 오해도 흥미로웠습니다. 그는 샹탈을 사랑하지만, 샹탈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바가 없다시피 하지요. 샹탈의 과거도 모를 뿐더러, 해변에서는 늙은 여자를 샹탈로 잘못 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익명의 편지를 보냄으로서 샹탈의 불만족을 쉽게 다스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요. 그는 샹탈이 누구인지, 샹탈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무지합니다.
타인의 정체성은 알 수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도 그 정체성을 온전히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하물며 수십 수백명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는 그것이 더더욱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혈액형, 별자리, MBTI를 통해 타인을 분류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 시간과 공을 들여 알아내는 대신, 이미 있는 자리에 그 사람을 넣고 너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니까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할거야, 라고 쉽게 생각하지요. 저는 이것이 상당히 키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밀란 쿤데라의 키치는 이 책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제시된 단어입니다. 말하자면, '자리에 걸맞지 않는 것들의 배제'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의 똥, 공산주의 사회의 반동분자, 각종 역할에 요구되는 페르소나지요. 우리는 어머니가 어머니답기를 기대하고, 아버지가 아버지답기를 기대합니다. 피해자가 피해자답기를 요구하며, 악인이 악인이기를 기대합니다. 그들을 알아가고자 하는 대신 이미 내가 정해둔 틀에 넣어버리는 행동이지요. 그 틀에 걸맞지 않는 요소들은 전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취급합니다. 나치 사회의 유대인이 그랬고, 신의 똥이라는 개념이 그랬지요.
이 키치의 개념은 인간의 정체성을 단정짓습니다. 장마르크가 생각했던 샹탈이라는 정체성은 일종의 키치였습니다. 자신이 익명의 편지를 보내면 기뻐해야하는 존재, 자신의 사랑을 언제든 받아줄 고정된 존재. 그리고 그 정체성에 대한 환상은 둘의 불화를 만들어내지요.
여러모로 즐겁게 읽은 책입니다. 하지만 결말부로 가는 부분이 이해하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도 여러모로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