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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댄스댄스

by lofi4 2024. 12. 5.

 

문학사상사
무라카미 하루키
2024.12.05


여러모로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작들을 읽지 않은 채로 읽으면 맥락을 파악할 수 없는 부분이 꽤 있었습니다. 오래된 판본이라 그런지 비문이 꽤 많았습니다. 

주제는 '과거와의 결별' 입니다. 소설은 주인공이 현실감을 상실한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그는 현실과 연결되지 못하고,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하지요. 그의 과거, 키키를 찾기 위해 삿포로의 돌핀 호텔로 향합니다. 

주인공은 줄곧 춤을 춥니다. 댄스댄스댄스, 현실의 리듬에 발을 맞춰 나가기 위해 애쓰지요. 호텔에서 만난 여자아이를 돌봐주고, 과거의 친구와 재회하고, 알맹이 없이 부풀어오른 자본주의에 리듬에 맞춰 발을 움직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이어지는 죽음 속에서도 춤은 계속되지요. 

과거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하루키는 멋지게 춤을 추라고 말한 셈입니다. 아내와의 결별로부터, 친구의 죽음으로부터, 허무로부터 결별하기 위해서는 현실에 발을 딛고 멋지게 춤을 추어야 한다고 말한 셈이지요. 과거에 집착하며 어둠 속을 헤메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사랑하는 여자를 꽉 끌어안아야한다고,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한다고.

태엽 감는 새 연대기와 어딘가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즐겁게 읽었으나, 개인적으로는 노르웨이의 숲과 해변의 카프카가 더 좋았습니다. 왠지모르게 양 사나이가 춤을 추라고 말하는 부분과 "제설 작업"이라는 비유가 짙은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밑줄 그은 문장

하지만 어쨌든 죽어버렸다. 한 번 죽어버리면, 그 이상 잃어버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죽음의 뛰어난 점이다. 

그들은 기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체로 노상 웃음을 띠고 있는데, 상황에 따라 웃는 얼굴을 스물다섯 종류 가량 사용할 수 있다. 정중한 냉소에서 적당하게 억제된 만족의 웃음까지. 그 웃는 얼굴의 단계별 변화에는 넘버 1에서 넘버 25까지 번호가 매겨져 있다. 그런 것들을 그들은 상황에 따라 골프 클럽을 골라잡듯 분간해 사용한다. 

"어쩔 수가 없지" 라고 나는 되풀이했다. "그건 알고 있어. 그러니까 제설 작업 같은거야. 하는 수 없으니까 하고 있는 거야. 재미나서 하는 것이 아니라구."
"제설 작업" 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문화적 제설 작업" 이라고 나는 말했다. 

"아까도 말한 것처럼, 나도 할 수 있는 데까진 하겠어. 자네가 제대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해보겠어" 라고 양 사나이는 말했다. 

"하지만 그것 만으론 부족해 자네도 할 수 있는 데까진 해야 해. 가만히 앉아서 생각에만 잠겨 있어서는 안 돼. 그렇게 한댔자 어디에도 갈 수가 없거든. 알겠어?"
"알겠어"라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 난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춤을 추는거야"라고 양 사나이는 말했다. 

"음악이 울리는 동안은 어쨌든 계속 춤을 추는 거야. 내가 하는 말 알아듣겠어? 춤을 추는 거야. 계속 춤을 추는 거야. 왜 춤추느냐 하는 건 생각해선 안 돼. 의미같은 건 생각해선 안 돼. 의미 같은 건 애당초 없는 거야. 그런 걸 생각하기 시작하면 발이 멎어버려. 한 번 발이 멎으면 이미 나로선 어떻게도 도와주지 못하게 되고 말아.(중략)
그러니까 발을 멈추면 안 돼. 아무리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런 데 신경 쓰면 안 돼. 제대로 스텝을 밟아 계속 춤을 추어대란 말이야. 그리고 굳어버린 것을 조금씩이라도 좋으니 풀어나가는 거야. 아직 늦지 않은 것도 있을 테니까. 쓸 수 있는 것은 전부 쓰는거지. 최선을 다하는 거야.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어. 당신은 분명히 지쳐있어. 지쳐서 겁을 먹고 있어. 누구에게나 그런 때가 있어. 무엇이고 모두 잘못돼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그래서 발이 멎어 버리거든."
나는 눈을 들어, 다시 벽 위의 그림자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하지만 춤을 추는 수밖에 없는 거야" 라고 양 사나이는 계속 말했다. 
"그것도 남보다 멋지게 추는 거야. 다들 감탄할 만큼 능숙하게. 그렇게 하면 나도 자네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 춤을 추는 거야. 음악이 계속되는 한."

"우리에게 현실은 없단 말이에요. 우리는 뭐랄까, 그저 그런 이미지예요. 허공에 떠 있는 거죠. 두둥실. 이름 같은 거 환상에 붙인 그저 그런 기호에 불과하죠. 그래서 우리도 되도록이면 서로의 이미지를 존중하려고 해요."

"그러한 것이 가치있던 시대가 확실히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달라. 무엇이든 돈으로 살 수 있지. 사고방식도 그래. 적당한 것을 갖고 와서 연결하면 돼. 간단하다구. 그날부터 곧바로 사용할 수 있어. A를 B에 삽입하면 되는거야. 눈 깜짝할 사이에 해낼 수 있지. 낡아버리면 교환하면 돼요. 그러는 편이 편리해. 시스템 따위에 구애를 받으면 시대에 뒤떨어지게 돼요. 눈치 빠르게 행동할수가 없어. 남들이 귀찮게 여긴다고."

"무엇인가를 혼자서 떠맡는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야. 너도 고통스럽고 나 역시 고통스러울 수가 있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아. 하지만 우리는 서로 이야기할 수 있어."

"성장하고 싶지 않아요."
"성장하는 수밖에 없어." 라고 나는 말했다. 
"싫어도 모두들 성장하는거야. 그리고 문제를 안은 채 나이를 먹고, 모두들 싫어도 죽어가는 거야. 옛날부터 주욱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야. 너만이 문제를 안고 있는 건 아냐."

"내게 묻지 말아요. 나는 어린애고, 아저씨는 어른이에요."
틀림없는 사실이야." 라고 나는 말했다. 

"자신이 없으니까 무기력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아무래도 사회적으로는 곤란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에요."

"아니, 그렇지 않아. 필요라는 건 그런 게 아냐. 자연스레 생겨나는 게 아니거든. 그건 그냥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거야."

나는 글 쓰는 일을 싫어하지 않는다. 거의 3년 동안 계속 눈 치우는 작업, 즉 생업에 종사해 오던 중, 나는 뭔가 나 자신을 위한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그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문장. 시나 소설이나 자서전, 편지 나부랭이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한 단순한 문장.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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