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프랑수아즈 사강
2024/12/29
사랑과 인간관계의 복잡함을 섬세하게 그린 작품입니다. 연인 로제에게 실망하고 외로움을 느끼는 폴, 그런 폴을 열렬히 사랑하는 젊은 시몽, 그리고 쾌락과 사랑 사이에서 방황하는 로제가 만들어내는 삼각관계가 중심입니다.
사랑이란 이유를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감정입니다. 외로움 때문일 수도 있고 단순히 끌림 때문일 수도 있고, 본능때문일지도 모르지요. 이런 이유들은 사랑의 본질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합니다. 어째서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지, 그리고 어쨰서 사랑이 사그라드는지는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요. 인과관계를 논리로 쌓아올려 설명해봐야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시몽의 사랑은 요구하는 사랑입니다. 폴이 자신을 내어주기를 바라고, 로제대신 자신을 연인으로 선택해주기를 바라지요. 단순히 연하이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가 바라는 사랑이 그런 쟁취하는 사랑인 것 같았습니다. 폴이 자신이 꿈꾸던 이상적인 여자라고 확신하며, 로제에게서 그녀를 뺏어와야하고, 자신을 던져서라도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야한다고 생각하지요. 혈기넘치는 젊은 이십대 초반의 사랑이랄까요.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세상이 그것에 부응하리라고 생각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폴에게는 시몽과의 사랑도 사랑이고, 로제와의 사랑도 사랑입니다. 다만 그 '사랑'이라는 것의 성격이 다르지요. 젊은 시몽은 자신 아주 열렬하고 뜨겁게 사랑합니다. 자신을 불태우는 사랑, 눈이 먼 사랑에 가깝지요. 로제의 사랑은 다릅니다. 보다 차분하지요. 폴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랑에 가깝습니다. 똑같이 '사랑'이라 부르는 것이, 당사자인 폴이 느끼는 바는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책의 사랑에는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복수, 절실함, 노화한 육체에 얽힌 자괴감, 혼란 등등.
삼각구도라 그런지 양귀자의 '모순'과 비교하며 읽게 되었습니다. 김장우와 시몽, 나영규와 로제. 남자들이 갖고 있는 상징, 낭만과 이성 중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어떤 사랑을 택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인가 등등을 고려하며 읽었습니다. 마음은 항상 낭만을 고르고 싶은데, 현실에서도 그럴 수 있을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소재가 소재라 그런지 이성적으로 설명되는 부분보다는 감성적인 면모에 기대어 묘사된 문장들이 많았습니다. 명확한 이유 없이 한순간에 기분이 바뀐다거나, 기분에 따라 사랑을 받아주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는 부분이 그랬습니다. 그런 부분의 기저에 깔린 감정들을 유추해가며 읽는 재미도 있었으나, 개인적으로는 조금 답답한 면도 있었습니다.
밑줄 그은 문장.
다음 순간 문득 그녀는 행복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번개 같은 깨달음과 함께 자신의 삶 전체와 세상을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 뱃전에 몸을 기울이고 빠르게 흘러가는 물에 손가락을 담그려 했던 것이다.~(중략)
그 이후에도 그녀는 다른 이들과 함께 혹은 다른 이들로 인해 행복감을 맛보았지만, 그렇게 전적으로, 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방식으로 행복했던 것은 조금 전 그 순간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이를테면 지켜지지 않은 약속에 대한 기억과 비슷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해심과 애정으로 인해 자신이 슬그머니 그의 상담자 역을 떠맡게 되었다는 사실에 점점 더 커져가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바로 그녀의 삶이 아닌가. 그런데 그는 그 사실을 잊고 있었고, 그녀는 정말이지 존경받을 만한 신중함으로 그가 그 사실을 잊는 것을 돕고 있는 셈이었다.
"저는, 저는 말입니다..."시몽이 짓눌린 듯한 음성으로 말을 시작했다. "저는 당신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저는, 그러니까 저는, 당신에게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가 아직도 갖고 있기는 할까?
"제겐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제겐 당신을 사랑할 권리가 있고,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서 당신을 빼앗아 올 권리가 있습니다."
'내겐 저 여자가 필요해. 그녀가 필요하다고...그녀를 갖지 못하면 고통으로 몸부림치게 될 거야'
그랬다. 그는 정직했다. 하지만 이렇게 뒤얽힌 삶 속에서 그런 정직성만으로는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없는게 아닐까 하고 그녀는 자문했다. 필요할 경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다 해도 말이다.
그가 확신하는 유일한 것은 그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는 폴의 사랑이었고 몇 년 전부터 그녀에게 집착해 온 자기 자신의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초인종 소리를 듣고 시몽에게 문을 열어주었을 때, 그의 짙은 색 넥타이와 불안이 감도는 눈빛과 그토록 삶에 응석을 부리고도 더 받을 게 있다는 듯 몸 전체에서 풍기는 커다란 환희와 난처해하는 태도를 보았을 때에는 그의 행복을, 자신이 그에게 준 행복을 공유하고 싶었다.
알다시피 난 지금 당신과 함께 있어서 무척 행복해.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그 이상이야. 당신도 나와 함께 있어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시몽은 때때로 자신이 힘들고 무용하고 승산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흐르는 시간이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없애야 하는 것은 로제와의 추억이 아니라 폴 안에 있는 로제라는 그 무엇, 그녀가 집요하게 매달려 있는, 뽑아 버릴 수 없는 고통스러운 뿌리 같은 그것이었다.
그녀는 로제를 가리켜 '그'가 아니라 '우리'라고 말하게 되리라. 왜냐하면 그들로서는 그들 두 사람의 삶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그들의 사랑을 위해 육 년 전부터 기울여 온 노력, 그 고통스럽고 끊임없는 노력이 행복보다 더 소중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바로 그 자존심이 그녀 안에서 시련을 양식으로 삼아,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로제를 자신의 주인으로 선택하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로제는 그녀에게서 언제나 빠져나갔다. 이 애매한 싸움이야말로 그녀의 존재 이유였다.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
사강의 작품이 강조하는 것은 사랑의 영원성이 아니라 덧없음이다. 실제로 사랑을 믿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농담하세요? 제가 믿는 건 열정이에요. 그 이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사랑은 이 년 이상 안 갑니다. 좋아요. 삼년이라고 해 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