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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by lofi4 2025. 1. 13.

 

 

서연비람
알베르 카뮈
2025.01.08


페스트는 거대한 부조리입니다. 인간 개인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재앙이지요. 카뮈는 페스트에서 이 부조리에 대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주인공 베르나르 리외는 의사로서 환자들을 치료하지만, 희망찬 영웅이 아닙니다. 페스트의 종식에 대해서는 체념한듯한 모습으로 환자들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행동을 꾸준히 해나갈 뿐이지요. 작중에서 그가 어떤 도덕이나 선의, 드높은 이상을 드러내는 장면은 없습니다. 그는 그저 묵묵히 거대한 부조리 속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피곤한 의사지요. 

타루는 리외를 도와주는 보건대원입니다. 그는 리외와는 달리 큰 이상을 품고 있습니다. 부조리에서 벗어난 성자가 되고자 하지요. 여기서의 성자는 신앙인의 의미라기보다는, 부조리한 세계와 협력하지 않고 자신 나름의 도덕을 세우며 반항하는 모습에 가깝습니다. 
그는 사회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부조리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목격한 뒤로 부조리 자체에 반항하고자 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페스트라는 부조리에 대항하며 리외를 돕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 라는 것을 리외와 함께 몸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파눌루 신부는 신앙인입니다. 페스트를 신이 내린 분노라고 말하며, 우리는 신을 완전히 사랑하거나 완전히 부정하는 것 둘 중 하나만을 택해야한다고 말하는 인물이지요. 그는 페스트라는, 어린아이를 고통스럽게 죽이는 부조리 또한 신의 섭리이며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읽을때는 그가 신앙인이라기보다는 광신도에 가깝다고 느꼈는데, 읽고나서 생각하니 이런 페스트와 같은 거대한 재앙을 신앙인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면 파눌루 신부처럼 해석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납득했습니다. 중간은 없지요.
저는 그런 신앙이나 믿음은 품지 못할 것 같습니다. 죄 없는 어린아이까지 죽이는 것을 신의 섭리라고 생각하며, 그런 신조차도 사랑해야한다고 말하는 건 아무래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사랑의 형태는 아니지 않을까요. 

랑베르는 자신의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봉쇄된 오랑을 탈출하고자 했던 신문기자입니다. 그는 페스트가 자신의 행복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며, 그것을 뛰어넘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해야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탈출하기로 한 날, 리외에게 돌아와 그를 돕기로 합니다. 페스트와 맞서 싸우고 있는 리외와 타루를 두고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 도망가게 되면 부끄러울 것이라고 말하지요. 하지만 리외는 그를 칭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행복을 선택하는 게 왜 부끄러운 일이냐고 되묻지요. 랑베르는 그의 말에, ‘그래요. 하지만 혼자만 행복한 것은 부끄러울 수 있어요.' 라고 말합니다. 
그는 부조리한 문제들에서 도피해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소시민에서, 이기적인 행복대신 부조리와 맞서 싸우는 것을 택하는 인간으로 성장하는 인물입니다. 카뮈는 그런 그를 칭찬하거나 포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대신 타인과 함께 불행을 짊어지기로 한 그에게, 따스한 결말을 돌려주지요. 

그리고 코타르. 자신이 저지른 죄에서 도망친 코타르는 페스트에 시달리는 도시의 불행을 행복하게 누리지만, 페스트가 끝난 도시의 행복에서 자신만이 고립되었다는 것을 알고 권총난동을 벌이다 붙잡히지요. 자신의 과오를 씻어내는 대신 도망치기만 하다가 불행해지는 인물입니다. 타인의 불행속에서 자신의 안온함을 발견하는 건 어쩌면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일지 모르겠으나, 그 지저분한 안온함의 말로는 결국 비참한 꼴이지요.

무척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카뮈의 실존주의에 대해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기뻤습니다. 코로나 때의 생각도 났고, 지금 제가 처한 부조리한 상황들에 대해 좀 더 다른 시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 같습니다.

 


밑줄 그은 문장

 

요컨데, 조제프 그랑 자신이, 어떤 단어를 써서 자기를 표현해야 할지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중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우리의 고통, 그리고 헤어져 있는 이들, 아들들과 아내들과 연인들이 겪고 있으리라 머릿속으로만 그리고 있는 고통이 그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심연과 산꼭대기의 중간에서 좌초된 채, 목적없는 나날들의 부질없는 추억에 몸을 맡기고, 고통의 땅에 뿌리박지 않으면 힘을 낼 수 없는 떠돌이 유령이 되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리외는 생각했다. ’사랑하든가 같이 죽든가. 그 외의 다른 선택은 없어. 당신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사실 재앙처럼 따분한 것도 없는데, 크나큰 불행이란 긴 시간 지속되는 것이므로 단조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그 속에 살았던 이들에게 페스트의 끔찍한 나날들이란, 잔인하고도 화려하게 확 타오르는 불길같은 것이 아니라 끝없는 답보 상태처럼 보이지만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이 짓이겨져 있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리외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단호한 어조로,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며 행복을 선택하는 데 부끄러울 일이 어디 있냐고 말했다. 
”그래요. 하지만 혼자만 행복한 것은 부끄러울 수 있어요.“
랑베르가 말했다. 

”세상에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고개를 돌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나 역시 그렇게 하고 있군요. 왜 그러는지 나도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아닙니다, 신부님. 저는 사랑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합니다. 어린이들이 고통당하도록 창조된 세계라면 저는 죽는 순간까지 거부할 것입니다.“

세상에는 선과 악이 있고 그 둘은 보통 쉽게 구분이 된다. 하지만 문제가 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악의 내부에 있다. 예를 들어 명백히 필요한 악이 있고 명백히 불필요한 악이 있다. 지옥에 빠진 돈 후안과 어린아이의 죽음이 있다. 탕아가 벼락을 맞는 것은 당연하지만 아이의 죽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인즉, 어린이의 고통과 그 고통이 가져오는 끔찍함, 그리고 그 고통을 설명해 주는 이유를 찾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에 없다. 

결국, 불행의 막바지에 가서는 아무도 진정으로 누군가를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진정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매 순간, 그 어느것에도 한눈을 팔지 않고, 집안일이 걱정되어도, 파리가 날아다녀도, 식사 시간에도, 온몸이 가려워도, 그를 생각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리와 가려움은 늘 존재하는 법이다. 그래서 사는 것이 힘든 것이다. 

네, 리외. 페스트 환자로 사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더욱 피곤한 일인 것입니다. 그렇기 떄문에 모든 이가 피곤해보이는 거예요. 왜냐하면, 오늘날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가 관심이 있는 건 어떻게 하면 성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거예요.“
타루가 꾸밈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신을 믿지 않잖아요.“
”바로 그렇기 떄문에, 신이 없어도 성자가 될 수 있는지가 지금의 내가 궁금해하는 단 하나의 구체적인 문제예요.“

그렇다면 리외는 무엇을 얻었는가. 그는 단지 페스트를 겪었고 그에 대한 기억을 가질 것이며, 우정을 경험했고 그를 추억할 것이다. 그리고 애정을 알게 되었으며 언젠가는 그것도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가 얻은 것이라곤 그뿐이었다. 인간이 페스트와 삶의 내기에서 얻게 되는 것이라곤 경험과 기억뿐인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타루가 말했던 승부였던가!

리외는 그랑과 코타르가 살고 있는 거리로 접어들면서, 적어도 가끔씩은 단지 사람과 함께라면, 가난하지만 굉장하기도 한 사랑만으로 충분한 이들에게 기쁨의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침묵하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페스트에 희생된 그 모든 이들을 위한 증언을 기록해 두기 위하여, 적어도 그들에게 가해진 부당함과 폭력의 기억을 남겨 두기 위하여, 단지 재앙의 한복판에서 우리가 배운 것,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경멸할 것보다 찬탄할 것들이 더 많이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말해 두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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