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음사
가즈오 이시구로
2025.02.14
1.
평생을 저택에서 일하다가 휴가를 얻어 자동차 여행을 떠나는 집사 스티븐슨의 이야기입니다. 굉장히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자기기만이 어떻게 인생을 망치는지, 자신의 정체성을 타인에게 의탁할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를 다룹니다.
2.
자기기만은 현대인에게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온갖 모순을 껴안고 살아가는 사회에서 자신의 신념과 행동을 일치시키며 살아가는 것은 무척 어렵지요.
스티븐슨은 품위라는 개념과 집사라는 직업으로 자신을 기만합니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들은 사실들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대신, '주인이 무조건 옳다'라는 명제뒤에 숨어 판단을 보류하지요. 그때문에 직업적으로 존경받을만한 위치에 오르지만, 한 명의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지 못합니다.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사랑에서도 완전히 실패하지요.
그런 스티븐슨의 회고를 보면서, 단순히 '열심히 산다' 라는 자세로는 인생을 충분히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어진 일을 아무런 의심없이 열심히 하는 것, 내게 주어진 환경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안전한 선택만을 반복하는 것 만으로는 인생을 충분히 유효하게 살아갈 수 없음을 느꼈습니다. 결국 자신의 선택에 대해 자신의 머리로 숙고하고, 그에 따르는 책임과 고통도 온전히 감당해야만 합니다.
요즘 생각하는 것인데, 스스로 선택하는 고통이야말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동력이 되는 것 같습니다. 부조리한 재난처럼 쏟아지는 고통에 희생자로 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감당할 가치가 있는 고통을 선택하고 그것을 감내하는 것이 인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머감각을 기르는 것의 중요성을 느꼈습니다. 유머는 가벼운 것, 유머의 대상에서 거리감을 두는 것이지요. 물론 집중과 몰입도 중요하지만, 인생을 좀 더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으려면 자신의 인생에 너무 매몰되지 않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스티븐슨은 자신의 눈 앞에 놓인 집사일에 매몰되어 자신의 인생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기회를 놓쳐버렸고, 늦은 여행을 떠나서야 가까스로 깨달았습니다. 만약 스티븐슨이 적절한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는 다른 선택을, 좀 더 나은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지요.
무척 재밌었고 읽기도 쉬웠습니다. 이시구로의 다른 책도 더 읽어 볼 생각입니다.
밑줄 그은 문장
위대한 집사들의 위대함은 자신의 전문역할 속에서 살되 최선을 다해 사는 능력 때문이다. 그들은 제아무리 놀랍고 무섭고 성가신 외부 사건들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점잖은 신사가 정장을 갖춰 입듯 자신의 프로 정신을 입고 다니며, 악한들이나 환경이 대중의 시선 앞에서 그 옷을 찢어발기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그가 그 옷을 벗을 때는 오직 본인의 의사가 그러할 때뿐이며, 그것은 어김없이 그가 완전히 혼자일 때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품위'의 요체다.
우리 중 직업적 야망을 품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각자 힘닿는 대로 이 중심축에 다가가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좀 전에도 말했듯 단순히 자신의 능력을 얼마나 잘 발휘하느냐의 문제뿐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해' 그렇게 하느냐의 문제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상주의적 세대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작게나마 기여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으며, 직업인으로서 그 소망을 실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문명을 떠맡고 있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신사를 섬기는 것이라고 보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늘날 그런 상황들을 되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순간들로 다가온다. 그러나 당시에는 물론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와 켄턴 양의 관계에서 엉뚱한 것들을 솎아 낼 수 있는 날이, 달이, 해가 끝없이 남아 있는 줄만 알았다. 이런저런 오해의 결과를 바로잡을 기회는 앞으로도 무한히 많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처럼 사소해 보이는 일들이 모든 꿈을 영원히 흩어 놓으리라고 생각할 근거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사람은 노예가 되어서는 품위를 지킬 수 없는 법입니다."
"~나리는 용기있는 분이셨어요. 인생에서 어떤 길을 택하셨고 그것이 잘못된 길로 판명되긴 했지만 최소한 그 길을 택했노라는 말씀은 하실 수 있습니다. 나로 말하자면 그런 말조차 할 수가 없어요. 알겠습니까? 나는 '믿었어요.' 나리의 지혜를. 긴 세월 그분을 모시면서 내가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지요.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