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책들
움베르트 에코
2025.02.22
*스포일러 포함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중세 기독교 사회의 권력 다툼과 진리 탐구의 문제를 다룹니다. 플롯과 단서를 따라가는 추리소설의 형식을 갖고 있지만, 주제는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것 보다는 진리의 속성을 탐구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수도원의 장서관은 방대한 지식을 보존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을 감추고 독점하고 있습니다. 장님 호르헤 수도사는 웃음을 경계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을 숨기려 애씁니다. 웃음은 진리의 불변성을 해치고 끌어내려 인간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진리를 성스러운 것, 고정된 것으로 여기는 호르헤는 이에 접근하려는 수도사들을 살해하기도 합니다.
반면, 윌리엄 수도사는 진리를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탐구해야 하는 과정으로 바라봅니다. 과학적인 사고방식에서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논리와 경험을 통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새롭게 조합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지요. 그는 연쇄살인사건을 쫒으며 논리와 관찰을 통해 가설을 세우고, 범인을 추적해나갑니다.
하지만 윌리엄 수도사가 밝혀낸 진리도 최후에는 수도원과 함께 불타버립니다. 보관되었던 모든 지식이 잿더미로 변하지요. 그는 자신이 논리적으로 세우고 추적해온 가설이 완전히 틀렸음을 깨닫고, 우연의 연속으로 사건의 전말을 밝혀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탐구가 무엇을 남겼는지 되돌아봅니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진리를 찾았느냐가 아니라, 진리를 어떻게 탐구했느냐가 핵심이라는 점이다. 수도원은 소멸했지만, 그 과정은 아드소의 기록으로 남아 다시 읽히고 해석되며 전해진다.
제목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만약 호르헤가 주인공이었다면, 이 소설은 ‘장미’가 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윌리엄 수도사가 주인공이었기에 ‘장미의 이름’이라는 제목이 붙었습니다. 즉, 불변하는 진리가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고 탐구하는 과정 속에서 부르는 ‘이름’, 덧없는 이름이 붙은 것이지요. 장미가 추위에 시들어 사라지더라도 봄이 오면 다시 장미가 피어나듯이, 이전의 진리는 새로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밑거름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후반부의 아드소와 윌리엄 수도사의 대화에서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사부님, 가능성에만 매달려서야 필연적인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느님과, 태초의 혼돈 사이에 무엇이 다릅니까? 하느님의 절대적 전능성과 그 선택의 절대적 자유를 긍정하는 것은 곧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같지 않을는지요?”
“네 질문에 그렇다고 해버린다면, 식자들이 어떻게 배운 것을 풀어먹겠느냐?”
진리라는 것은 끝없이 변화하는 가능성이고, 실체를 포착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이런 혼돈의 형태로는 진리를 전달할 수 없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이름’, 즉 언어라는 틀로 진리를 고정합니다. 그것을 책이나 대화라는 매체로 서로에게, 후대에게 전달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새로운 진리를 탐구하지요. 우리는 아드소가 남긴 ’이름‘을 통해 새로운 진리를 탐구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태도는 불교의 ‘무상(無常)’ 개념과도 닮아 있습니다. 만물은 끊임없이 변하고, 진리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진리를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탐구하는 과정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발견한 진리를 집착하거나 신성시하는 대신, 그것을 다음 탐구를 위한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장미의 이름은 끝없이 변화하는 진리를 ‘이름’이라는 언어로 포착한 이야기입니다. 수도원이 불타는 것은 지식과 진리의 소멸이 아니라 이름의 새로운 변모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아드소의 수기를 읽으며 수도사들이 진리를 다루었던 과정 속에서 또 다른 진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의 종착점이 아니라, 끊임없이 탐구되는 과정이다’
밑줄 그은 문장
다행히도 이성이 다시 눈을 뜬 지금, 이성이 잠들어 있던 탓에 나타났던 괴물들은 모두 추방되었기에 우리 시대와 아무 관련이 없으며, 우리의 희망과 우리의 확신과는 시간적으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적지 않은 위안이 되어 주었다.
진정한 배움이란, 우리가 해야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니야. 할 수 있었던 것, 어쩌면 해서는 안되는 것까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일까, 아니면 죽음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것이 어떤 진리이든 자신만의 진리를 주장하는 것일까?
서책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새로운 탐구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삼는 것이 옳다. 서책을 대할 때는 서책이 하는 말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 ~
아무리 그 뜻이 고상하다고 하더라도 언어적 관념이라는 것은 반드시 논의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법이다.
하나 문제는 그리스도꼐서 가난했느냐, 가난하지 않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청빈해야 하느냐, 그렇지 않아도 되느냐에 하는 데 있다. <가난>의 의미는 궁전을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있지 않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땅의 일에 대해 다스릴 권리를 갖느냐 포기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질서란 그물, 아니면 사다리와 같은 것이다. 목적을 지닌 질서이지. 그러나 고기를 잡으면 그물을 버리고, 높은 데 이르면 사다리를 버려야 한다. 쓸모있기는 했지만 그 자체에는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되니깐 말이다.
…그래서 비로소 대답하거니와, 우리에게서 사라지는 것들은 그 이름을 뒤로 남긴다. 이름은, 언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존재하다가 그 존재하기를 그만둔 것 까지도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이 대답과 더불어, 이 이름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 해석에 대한 결론을 독자의 숙제로 남기고자 한다….화자는 자기 작품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 화자가 해석하고 들어가는 글은 소설이 아니다. 소설이라는 것은 수많은 해석을 창조해야 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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