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2025.02.15
1.
도스토옙스키의 초기작품입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하급 문관 마카르 제부시킨과 집안이 몰락해서 가난해진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가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2.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 등장하는 가난은 무척 생생합니다. 찢어진 옷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냉기, 낡아서 떨어진 장화 밑바닥, 밀리고 밀린 집세의 압박감. 이러한 현실묘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비굴해지고, 어떻게 자존심을 버리며, 어떻게 현실에서 도피하도록 내모는지 보여줍니다.
3.
이 소설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주인공들이 가난을 극복하거나 그 속에서 살아갈 의지를 북돋아주는 감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를 더욱 깊은 심연으로 끌어당기는 중력과도 같지요. 제부시킨은 자신의 집세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형편임에도 바르바라에게 과자나 사탕같은 것을 사 보냅니다. 돈이 없어서 빚을 지고, 비굴하게 지내면서도 그녀에게 선물을 보내기를 멈추지 않지요. 바르바라는 몸이 병약해졌음에도 먹고 살기 위해 일을 멈추지 못합니다.
읽으면서 '사랑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한다'는 문장을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대할 때 으레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대하기 마련이지만, 사실 사랑만큼 인간을 괴롭게 만드는 것도 없습니다.
이 소설의 사랑은 혼자였다면 그저 배고픔과 추레함으로 남을 가난을 저주스러운 비참함으로 만듭니다. 사랑하는 이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것을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무력함, 자그마한 행복조차 마음 편히 누릴 수 없게 만드는 부조리한 세계가 두 사람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남자들은 술을 마십니다. 처음에는 없는 형편에 왜 술이나 마시고 있느냐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읽으면서 비참하기 때문에 더욱 비참한 행동을 선택하는 인물들에게 우울한 공감이 되었습니다. 일어나서 다시 넘어지는 아픔을 겪느니 차라리 넘어진 채로 누워있기를, 비참한 현실을 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현실과 맞서싸울 힘을 잃고, 술로 현실을 잊으며 제 발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들의 모습은 비참하고 서글픕니다.
4.
책을 덮고 나서, 이 두 인물이 품고 있는 감정이 정말 사랑일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제부시킨은 바르바라를 여자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돌봐줘야 할 연약한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작은 천사', '부모잃은 고아', '귀여운 사람' 으로 부르지요.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 돌보아야 할 대상처럼 대합니다.
바르바라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그녀는 제부시킨이 선물이나 돈을 보낼 때마다 감사하다고 받는 대신, 그가 스스로를 위해 사용해야 할 돈을 자신에게 낭비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의 선물은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지요. 그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걱정하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가 스스로를 깎아내어 자신에게 헌신하는 것을 막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품었던 과거의 사랑 이야기도 숨김없이 제부시킨에게 보여줍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과거에 품었던 사랑 얘기를 가감없이 한다는 건 어딘가 이상하지 않나요.
사랑의 형태는 저마다 각각이라지만, 바르바라와 제부시킨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부르는 건 적절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5.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입문하기에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소설에 비해 상당히 얇은 축에 속하면서도, 내용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다만 일반적인 소설의 형식이 아니라 편지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합니다.
밑줄 그은 문장
추억이란 즐거운 것이든 슬픈 것이든 항상 고통스러운 법이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렇다. 하지만 그 고통은 달콤하다. 마음이 무겁고 아프고 괴롭고 슬퍼질 때 추억은, 촉촉한 저녁 이슬방울이 한낮의 폭염에 시들어 버린 가련한 꽃을 싱싱하게 소생시키듯이, 우리의 마음을 상쾌하고 활기차게 한다.
오, 나의 친구여! 불행은 전염병과 같습니다. 불행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더 이상 전염되지 않도록 서로 피해야 합니다. 당신의 소박하고 고독한 생활에서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불행을 제가 당신께 안겨 준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저를 괴롭히고 낙담하게 합니다.
아아, 바렌카, 바렌카! 도대체 당신은 왜 그런 결심을 했나요,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할 수 있었죠?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도대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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