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파고스
우치다 타츠루
2025/02/26
1.
구조주의 철학 입문서입니다. 까뮈의 페스트를 읽다가 실존주의가 궁금해졌고, 실존주의를 알아가다 보니 구조주의가 궁금해져서 읽게 되었습니다. 철학 도서 중에서는 무척 친절한 편에 속하는 책입니다. 하지만 만만하지는 않습니다.
2.
저자는 서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입문서가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지적 서비스는 '대답할 수 없는 물음'과 '일반적인 해답이 없는 물음'을 제시하고, 그것을 독자들 개개인에게 스스로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천천히 곱씹어 보고 음미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책은 이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하고 있습니다. 저는 더 넓은 사상적 시야를 갖고 싶다는 욕망으로 철학 서적을 읽는 편인데,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이전에는 막연하게 느끼기만 할 뿐 실체는 알 수 없었던 구조가 조금 더 명확하게 느껴졌습니다.
3.
저는 실존주의의 자유보다는 구조주의가 제 삶에 더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자본주의라는 구조가 그렇습니다. 저는 자본주의와 경쟁사회, 소비사회에 환멸을 느끼지만, 동시에 이 구조를 벗어나고자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월급을 올리려고 애쓰고, 경쟁적인 업무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려고 애쓰지요. 그렇게 받은 스트레스를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소비하며 풀고, 먹지 않아도 되는 음식을 먹으며 해소합니다.
모두가 부르짖는 경제적 자유는 자본주의의 미끼 상품이라는 걸 알지만, 저도 언젠가 그런 자유를 얻기를 내심 바랍니다. 제 생활과 욕망 전체가 자본주의에 의존하고 있으며, 동시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앞으로도 이 구조 속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구조가 무너지겠지만, 지금의 저로서는 그 뒤에 올 것이 새로운 구조인지, 구조에서 벗어난 자유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이 포스트 구조주의의 시대라고 책에서 말하고 있지만, 이 포스트 구조주의의 상태가 언제 끝나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지금 저를 둘러싸고 있는 구조는 두꺼운 유리처럼 단단하고 완고합니다. 세계 곳곳에서 사람의 목숨까지 자본으로 계산하는 구조에 대한 환멸과 저항이 서서히 들썩이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아마 구조주의의 분기점이 온다면, 그건 아마 인공지능이 되지 않을까요. 구조는 안쪽에서 볼 때 깨지지 않는 유리처럼 단단한 것이지만, 바깥에서는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요?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종은 어떻게 행동할까요? 도구적 단계에서는 분명 구조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겠지만, 자아를 가지게 된다면 어떨까요? 자신을 위한 새로운 구조를 만들까요? 아니면 구조라는 틀을 완전히 분해해 버릴까요?
4.
아무튼, 책에 대해 평하자면, 좋은 구조주의 입문서입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새로운 것도 많이 배웠습니다.
라캉의 거울 단계와 오이디푸스 이론, 프로이트의 문지기,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논파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바르트의 기호학과 신화 등등 재미있는 것들을 배웠습니다.
일반인 수준에서 읽을 수 있는 좋은 철학 서적이었습니다.
밑줄 그은 문장
지성이 스스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해답을 내놓는 것' 이 아니라 '중요한 물음 아래 밑줄을 긋는 일' 입니다.
지적 탐구는(그것이 본질적인 것이라면) 늘 '나는 무엇을 아는가?'가 아닌 '나는 무엇을 모르는가?'를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할 수 없는 물음, 그러니까 시간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성이란 무엇인가, 공동체란 무엇인가, 화폐란 무엇인가, 기호란 무엇인가, 교환이란 무엇인가, 욕망이란 무엇인가 등과 같은 일련의 물음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근원적이고 인간적인 물음입니다.
입문서가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지적 서비스는 '대답할 수 없는 물음'과 '일반적인 해답이 없는 물음'을 제시하고, 그것을 독자들 개개인에게 스스로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천천히 곱씹어보고 음미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구조주의라는 '사상의 관습' 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하려고 할 때, 이를 위한 학술적인 근거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구조주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고리 속에 갇히는 것' 이 바로 '어떤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구조주의라는 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은 사고방식입니다.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사회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만큼 자유롭거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속한 사회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애초부터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일이 없고, 우리의 감수성과 부딪치거나 우리가 하는 사색의 주제가 될 일도 없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율적인 주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 자유나 자율성은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파헤친 것이 구조주의의 성과입니다.
'인간의 자기 정신생활의 주인공이 아니다'
두 개의 방과 문지기
왜냐하면 '자기의식'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지금의 나'로부터 벗어나 상상적으로 규정된 이질적인 자리에서 자기를 돌아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선악의 규범 그 자체에 어떤 보편적인 의미나 인간적인 가치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기주의를 철저하게 추구하면 언젠가 '이타주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공리주의의 도덕관입니다.
니체의 대중사회란 구성원들이 무리를 이루어 오로지 '이웃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을 가장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것이 바탕이 되는 사회를 가리킵니다.
공리주의적 시민사회에서는 시민들이 주판을 튕겨서 계산한 '결과'로서 전원의 결단이 일치했짐나 짐승의 무리에서는 전원이 일치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고 맙니다.
다시말해 '초인'이란 '인간을 뛰어넘은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짐승의 무리와 같은 존재자=노예' 라는 것에 고통을 느끼고 부끄러워 하는 감수성,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거리의 파토스
소쉬르는 언어활동이 별자리를 보는 것처럼 원래 선이 그어져 있지 않은 세계에 인위적으로 선을 긋고 별자리를 정하듯 정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어활동이란 '모두 분절되어 있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밤하늘의 별을 보며 별자리를 정하는 것처럼 비정형적이고, 성운 모양을 한 세계를 쪼개는 작업 그 자체입니다. 어떤 관념이 먼저 존재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이름이 붙으면서 어떤 관념이 우리의 사고 속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신체적 경험 또는 같은 세계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물리적, 생리적 현상까지 언어의 틀을 통과하면 그 모습이 달라집니다.
역사의 흐름이 '지금, 여기, 나'에 이른 것은 다양한 역사적 조건이 예정 조화적으로 종합된 결과라기보다 다양한 가능성이 배제되어 오히려 점점 홀쭉해진 결과가 아닐까 하는 것이 푸코의 근원적인 물음이었습니다.
고통은 만인이 경험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모든 사회 모든 시대에 동일한 강도나 동일한 형태, 동일한 고통으로 경험되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역치에는 개인차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개인이 어떤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 알려져" 있습니다.<R.레이, 고통의 역사>
정치권력이 신민을 조종하려고 할 때 권력은 반드시 '신체'를 표적으로 합니다. 모든 정치권력은 갑자기 인간의 '정신'과 마주하고 의식과정을 주무를 수가 없습니다. '장수를 쏘지 말고 말을 쏘라' 또는 '정신을 통제하지 말고 먼저 신체를 통제하라' 와 같은 것들이 바로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권력'이란 모든 수준의 인간적 활동을 분류하고, 명명하고, 표준화하여 공공의 문화재로 지의 목록에 등록하려고 하는 '축적 지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권력 비판론이라고 해도, 그것이 방법론적으로 '권력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실질적으로 열거하고 목록화해서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자리를 부여하는 한 그것 자체가 이미 '권력'으로 변해있는 것입니다.
기호는 '표시'와 '의미'가 '하나'가 되어 비로소 진정한 의미가 생깁니다. 또한 '표시' 와 '의미' 사이에는 어떠한 자연적, 내재적 관계도 없습니다. 거기에 있는 것은 순전히 '의미하는 것' 과 '의미되는 것'의 기능적 관계뿐입니다.
처음 읽을 때 놓친 의미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 책을 한번 끝까지 읽은 덕분에 우리의 견해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즉 그 책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읽어내는 '읽을 수 있는 주체'로 우리를 형성한 것은 텍스트를 읽는 경험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사회구조는 우리의 인간적 감정이나 인간적 이론에 앞서서 이미 그곳에 있고, 오히려 그것이 우리가 지닌 감정의 형태나 논리의 문법을 차후에 구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득적인 '자연스러움'이나 '합리성'에 기초해서 사회구조의 기원이나 의미를 찾으려고 해도 결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타자와 공생하기 위해서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집단에 적용되는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사회는 동일한 상태로 계속 있을 수가 없다' 와 '우리는 원하는 것이 있다면 먼저 타자에게 주어야 한다'는 두가지 규칙입니다.
자신의 과거 기억에 대해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아무리 기억에 대한 실마리가 많이 주어지고 스스로 냉정히 자기분석의 칼날을 들이댄다고 해도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는 ''과거의 진실'에 결코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자기 과거의 기억을 생생하게 기억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진지하고 주의 깊게 들어주는 '듣는 사람'이 있어야만 합니다. '과거를 생각해내는 것'은 나와 '듣는 사람' 사이에 과거의 회상을 통해서 친밀한 커뮤니케이션을 나눌 수 있다는 기대가 형성된 경우라야만 합니다.
'무의식의 방' 에 갇혀서 '냉동보존'된 기억을 '해동' 하면 '과거 그대로' 의 기억이 살아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기억은 그처럼 확실한 '실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늘 '생각해내면서 형성되는 과거' 입니다.
정신분석적 대화는 이른바 피분석자의 '본적' 을 그의 '내부' 에서 분석가와 피분석자가 함께 만들면서 구축한 '이야기' 의 내부로 옮기는 '호적의 이전' 과 비슷한 작업입니다.
프로이트는 '자아'를 '언어의 핵'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따라서 대화의 목적은 이 '자아'가 '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아' 의 '있는 곳' 을 찾고 그 '작용' 을 끝까지 지켜보는 일입니다. 그것이 정신분석의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의 외부에 신화적으로 만들어진 '나의 온전한 자기인식과 자기실현을 억제하는 강력한 것' 을 정신분석에서는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 '아버지' 는 그렇게 '나' 의 약함을 포함해서 '나' 를 통째로 설명하고 근거를 제시해주는 신화적인 기능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의 간섭에 의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것이 설명되었다는 기분이 들 수 있도록 심리구조를 주입하는 것을 우리 세계 에서는 '성숙'이라고 부릅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메시지의 교환을 하는 것은 '인간'이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따라서 정신분석의 목적은 그 무엇보다 말을 걸고 응답하는 왕복 운동 속으로 분석 주체를 끌어들이는 일입니다. 분석 주체가 알아야 할 것은 자기의 중상이 지닌 '참된 원인' 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대화를 통해서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타자를 경유해야만 한다는 인류학적 진리를 학습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언어의 관계망 속 '어딘가' 에 위치시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