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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fi4 2025. 3. 16.


민음사
장폴 사르트르
2025/03/15


1.  
쉽지 않은 책이었습니다. 말, 읽기와 쓰기를 중심으로 성장한 사르트르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다룹니다. 사르트르 자신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일들을 겪으며 자신의 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는지를 문학적인 문장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된다기보다는 생각과 의식의 흐름을 중심으로 진행되어서 쭉쭉 읽어나가긴 어렵습니다.

2.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카뮈의 실존주의와 무엇이 다른지, 어째서 레비스트로스 구조주의에게 비판당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해서 읽었습니다. 제가 읽은 것을 아주 짧게 요약하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하는 존재다’라는 문장이 될 것 같습니다.

3.  
이 책을 읽는 동안, 소설에 가까운 자서전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상세하고 논리적인 대답을 하는 게 가능할까요? 읽으면서 제가 대여섯 살에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모호하고 흐려진 기억뿐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어떤 행동을 했었는지, 주위의 어른들이 무슨 말을 했었는지를 문장으로 쓸 수 있을 만큼 단단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코끝을 스쳐 지나가는 어렴풋한 냄새 같은 감각뿐이었지요.

하지만 사르트르는 자신이 어째서 읽는 아이가 되었는지, 할아버지가 어떤 존재였는지, 그것이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분석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몸이 왜소하고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서 읽기와 영웅서사에 빠져들고, 상상 속에서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며 연극적인 아이로 자라났다, 그러다 주위 어른들이 자신에게 속아넘어가고 있는 게 아니라 연극에 어울려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두게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은 자신의 유년 시절을 이렇게 명확한 인과관계를 통해 분석한다는 것이 묘하게 느껴졌습니다. 정말 사르트르는 자기 자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았던 걸까요?

그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저는 그의 명료한 사고방식에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제게는 불가능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기만이라는 두터운 벽이 존재하고, 인간은 논리라는 도구로 계량하기 어려운 무의식과 감정에 휩쓸리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언어라는 구조 자체가 말하지 않은 것을 배제하는 일면적인 도구라지만, 사르트르가 그리는 그의 유년 시절이 너무 선명해서 마치 그가 만들어 낸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가 갖는 성격, 문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선택하는 자유로운 존재다.’라는 문장을 두고 생각할 때, 사르트르의 자유는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편집할지 결정하는 자유를 일컫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니코친 카잔차키스의 조르바적 자유와 같은 현재의 자유가 아니라, 과거를 재창조하는 자유에 가까운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는 이성의 제한을 크게 받으므로, 말과 논리의 구조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무시하게 되는 위험성을 품고 있습니다. 인과관계로 확실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배제되고, 자신의 기억에 남은 것들만이 중요한 요인이라고 여기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중세의 신학이 품었던 오류를 똑같이 반복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 성경에 적혀 있다. 어떤 것이 성경에 적혀 있지 않다면 그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은 취약합니다. 기억은 고정되어 있는 과거가 아니라 무의식과 현재의 기분에 영향을 받는, 현재와 상호작용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트라우마로 인해 어떤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기도 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실관계를 뒤집기도 합니다. 이런 취약한 기반을 근거 삼아 자신의 과거를 재해석하는 것을 ‘자유’라고 부르는 건, 제겐 다소 신뢰가 가지 않는 선언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기에 사르트르의 실존은 ‘사실’이 아닌 ‘선언’처럼 보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언어의 힘을 빌어서 자신의 과거를 재창조하는 존재, 그것을 근거 삼아 현재의 자신을 창조하는 실존이지요. 하지만 이 부분은 구조주의자들이 비판했던 것처럼, 언어라는 구조, 사회라는 구조에 속박당한 자유라는 것이 과연 자유로운 것인가? 라는 의심을 품게 만듭니다.




밑줄 그은 문장


사람은 저항함으로써만 자신을 확정해 나갈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속속들이 불확정적인 존재였다. 사랑과 미움은 동전의 앞뒤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사랑한 일이 없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워하는 동시에 환심을 살 수는 없는 법이니까. 또한 환심을 사려는 동시에 사랑할 수도 없는 법이니까. 

그들은 어찌나 차분했는지 한 사람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이 세상의 재물은 그 소유자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준다. 반대로 내게는 그것이 내가 어떤 사람이 아닌가를 가리켜보였다.

그의 이름을 입 밖에 내기가 무섭게 이 빽빽한 방 안에 칼로 도려낸 듯이 빈자리가 파였다. 한 인간이 이미 마련된 제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의 자리, 그곳은 만인의 기다림으로 하여 깊숙히 파인 허공이며, 육신이 갑자기 다시 태어날 듯한 보이지 않는 자궁이다. 

삶이 무의미하면 할수록 더욱 죽음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되기 마련이다. 

공상에 공상을 거듭하면서도 내가 꼭 잡아보려고 한 것은 현실이었다. 

노아의 홍수 이전의 세계로부터 불쑥 출현하여, 남들의 눈에 그렇게 보이기를 바라는 그런 ‘타자로서의 나’가 되기 위하여 ‘자연’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나는 내 ‘운명’을 마주 보았고 똑바로 인식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 ‘자유’였다. 나는 내 자유를 마치 외적인 힘처럼 내 앞에 우뚝 세워 놓았던 것이다. 요컨대 나는 이제 나 자신을 완전히 속일 수도 없었고 미몽에서 완전히 깨어날 수도 없었다. 

-자신이 필연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인간은 '운명'이라는 이름의 필연성, 즉 자기기만과 마주하게 된다. 운명은 외부 세계가 자신에게 필연성을 부여하는 기만적 장치이며, 그는 이 자기기만을 마치 외적인 힘, 즉 운명이라 이름 붙인 외부의 힘으로 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자유가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존재의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운명과 같은 필연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나는 슬그머니 나 자신을 구제하기 위해서, 제주이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덤으로’ 자신을 구제하기 위해서 민중들의 공인 구제사를 자처했던 것이다. 

문학에 있어서는 증여자 스스로가 증여물로, 즉 순수한 사물로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우연은 나를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너그러움은 나를 책으로 만들 것이다. 나는 수다를 떠는 나의 의식을 활자화하고 삶의 소음 대신 불멸의 기록을 남기리라. 그리고 육체 대신 문체를, 시간이라는 연약한 나선 대신 영원을 얻으리라. 

세계는 말로 변신하기 위해서 나를 이용하는 셈이었다. 

나는 항상 세상을 탓하기보다는 자신을 질책하기를 좋아했다. 마음이 착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은 오직 자신에게서 비롯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째서 과거가 나를 풍요하게 해 주었단 말인가? 과거가 나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바로 나 자신이 나의 잿더미에서 소생하면서 부단히 다시 시작되는 창조를 통해서 나의 기억을 무로부터 건져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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