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양사
프리초프 카프라
2025/03/22
어렵고도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2부까지는 비교적 따라가기 쉬웠지만, 3부 후반부 부터는 이해하기가 확실히 어려워졌습니다. 양자론이나 상대성 이론 같은 과학 개념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다면 훨씬 더 깊이 있고 재밌게 읽을 수 있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책 자체가 꽤 친절한 편이어서, 과학에 익숙하지 않은 저도 핵심적인 주장은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었습니다.
가장 흥미로웠던 건, 과학과 동양 사상이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것 같지만 결국 비슷한 지점에 닿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양자법칙과 불교”, “시바신과 상대성 이론”등등, 처음엔 이런 조합이 대체 어떻게 연결되나 싶었지만, 책을 읽다 보면 점점 그 연결이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과학은 이성적 사고로, 동양 사상은 직관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데, 두 방향이 결국 같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걸 보고 있노라면 신기합니다.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어느 하나도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라는 말을 예시로 들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 문장이 그냥 서로에게 친절하게 지내자는 의미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서는 훨씬 깊은 차원에서 풀어냅니다. 양자론에서는 어떤 입자도 고립되어 있지 않고, 주변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 속의 현상'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보고 만지는 모든 것도 사실은 하나의 흐름 속에 잠시 엮여 있는 매듭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거예요. 이 개념을 시바신의 우주적 무도라는 개념을 통해 다시 한번 설명하는데, 과학과 신비주의가 이렇게 맞닿을 수 있다는 게 무척 신기했습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모든 것은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개념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들이 있다고 믿습니다. 나 자신, 인간관계, 돈, 시간 같은 것들 이지요. 하지만 양자론은 정지해 있는 물체조차 들여다보면 끊임없이 진동하는 입자들의 집합이라고 설명합니다. 불교 역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며, 집착할수록 괴로움이 커진다고 이야기하죠.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함이 양자역학에서 엿보이는 것이 기묘했습니다.
반면, 이해가 어려운 부분도 많았습니다.
양자장, 시간의 역행같은 부분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전자장과 아원자 입자, 반입자같은 개념은 그래프나 설명을 여러 번 읽어도 선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이 부분은 온전히 이해하려면 어느정도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 깊은 책이었습니다. 과학에 관심 있는 분은 물론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히고 싶은 분들에게도 한 번쯤 추천해보고 싶은 책입니다. 어렵지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밑줄 그은 문장
존재의 의미는 객관적인 것의 합리적 이해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느낌을 갖느냐는 주관적 체험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며, 이것은 종교나 예술 정신으로 통하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적인 속성이 지성으로 분석될 때마다 그것은 불합리하거나 역설적인 것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우리가 보거나 듣는 것은 결코 탐구된 현상 그 자체가 아니라 언제나 그러한 과정의 결과인 것이다. 원자와 아원자 세계 자체는 우리들의 자각 영역 밖에 있는 것이다.
예컨대 물질에 대한 어떤 아이디어가 양자장 이론의 어떤 국면에 의해 물리학자들에게 전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힌두교도들에게는 시바신의 우주적 무도에 의해 전달된다. 춤추는 신과 물리학적 이론은 양쪽 다 마음의 소산이며, 그 지어 낸 이의 실재에 대한 직관을 기술하는 모형인 것이다.
나와 세계,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의 데카르트적 구분은 원자적 물질을 다룰 떄에는 성립할 수가 없다. 원자 물리학에서는 우리 자신을 동시에 언급하지 않고서는 자연에 관해서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브라만이 인간의 영혼 속에 현시되는 것을 아트만이라 부르고 이 아트만과 브라만, 즉 개별적 실재와 궁극적 실재란 사상은 우파니샤드의 한 본질을 이루고 있다.
마야는 이러한 개념을 실재로 간주하는, 지도를 영토로 혼동하는 환상이다. (동굴의 그림자)
힌두교도들이 아처럼 수많은 신들에 어떻게 다 대처하는가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 모든 신들이 그 본질에 있어서는 다 동일하다는 힌두교의 기본적 태도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들은 모두 다 같은 거룩한 실재의 갖가지 현시며, 무한하고 무소부재하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브라만의 다른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보살의 이상은 무아라는 불가의 교리와도 역시 합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각기 따로 떨어진 개별적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한 개체가 혼자 열반에 든다는 생각 또는 이치에 닿지 않는 까닭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도에 관해서 묻고, 다른 사람이 거기에 대답한다면 그들 중의 누구도 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당신이 선을 공부하기 전에는, 산은 산이고 강은 강이다. 선을 공부하고 있는 동안에는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고 강은 더 이상 강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일단 개오를 얻고 나면 산은 다시 산이고 강은 다시 강이다.
우리들이 입자도 역시 하나의 파동이라고 말할 때 파동 모형은 입자의 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의미하는 본뜻은 전체로서의 파동 모형은 입자의 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원자적 입자가 일정한 장소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렇다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다. 입자는 확률 모형이므로 여러 장소에 존재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으며, 그리하여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기이한 종류의 물리적 실재를 표현하고 있다. 그렇기 떄문에 우리는 입자의 상태를 고정된 대립 개념으로서 기술할 수 없다. 입자는 어느 한정된 장소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 위치를 변화하지도 않으며 또 정지된 채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다. 변화한다는 것은 확률 모형이며, 그러므로 일정한 장소에 존재하려는 입자의 경향들이다.
우리가 입자의 위치를 더욱 정확하게 정하려고 하면, 다시 말해서 입자의 파속을 보다 좁은 영역에 한정시키려고 하면 파장 확산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입자의 운동량의 불확정성이 더 커지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원리)
상대성 이론은 공간이 3차원이 아니며 시간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양자는 밀접하고 시간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양자는 밀접하고 분리할 수 없게 연결되어 있으며 시공이라고 불리는 4차원의 연속체를 구성한다.
비록 유기적 세계관의 개념들이 인간적 규모의 과학과 기술에는 거의 가치가 없지만 20세기의 물리학은 원자적 그리고 아원자적 수준에는 매우 유효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왔다. 그러므로 유기론적 견해는 기계론적인 것보다 더욱 근본적인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