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머싯 몸
민음사
2025/03/11
1.
소설을 다 읽고 제목인 『달과 6펜스』가 소설의 내용과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갈등의 핵심이 ‘달(이상)’과 ‘6펜스(금전)’라고 하면, 보통은 인물이 돈과 꿈 사이에서 고민하거나 최소한 금전에 대해 어느 정도 미련을 보이는 모습을 상상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는 소설 내내 6펜스를 상징하는 돈·명예 따위에 관심조차 두지 않습니다.
그는 달을 좇습니다. 스트릭랜드가 가족과 사랑, 건강마저 내던지며 그림만을 좇는 과정에서 드러나듯, 그에게 세상의 보편적인 가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예술만이 그의 중심이지요. 스트릭랜드의 내면에서 세속적 가치와 예술이 충돌하는 경우는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사랑과 예술이 충돌합니다. 찰스 스트릭랜드는 총 세 명의 여자와 관계를 맺는데, 원주민인 아타를 빼고는 전부 내팽개치듯 버립니다. 그는 여자들의 사랑을 멸시하고 사랑에 속박당하는 것을 혐오하지요. 그는 여자에게 욕망만 해소하면 된다는 듯이 말하는데, 주인공도 그를 보며 “여자가 가재도구이던 시절에 태어났어야 한다”라고 빈정거립니다.
그런 스트릭랜드를 마지막에 품어주는 것이 원주민인 아타인데, 작가는 아타의 사랑이 스트릭랜드의 예술혼 못지않은 초월성을 띤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스트릭랜드의 그림에 대한 열망과 초월적이긴 하지만 여전히 의존적 성격을 띠는 아타의 사랑을 같은 무게로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2.
읽다 보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가족을 버리면서까지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과연 온당한가? 가족이나 의무, 세간의 시선 등을 아예 고려하지 않을 정도로 광포하게 몰입하는 모습은 정상적인 삶의 관점에서 보면 ‘광기’로 여겨집니다.
스트릭랜드라는 인물이 흥미로웠던 점은 그의 예술이라는 가치가 설득력 있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도취시키는 가치를 사랑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다른 가치들이 빛을 바래게 만들지요. 연인과 사랑에 빠진 사람은 친구나 가족에게 소홀해지고, 도박에 중독된 사람은 밥 먹는 것도 잊습니다. 마찬가지로 스트릭랜드는 예술이라는 가치를 좇았기 때문에 사회가 말하는 보편적인 가치들에 공감할 수 없었지요.
아름다움에 대한 천착이라는 점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가 떠올랐습니다. 『금각사』의 주인공은 금각(金閣)의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다른 아름다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 결과 삶을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일종의 마비에 빠지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금각을 불태우게 되지요. 금각의 아름다움에 매몰되어 다른 가치가 전부 빛을 잃은 것입니다. 하나의 절대적 가치를 좇는 자세는 그 이외의 모든 것들이 빛을 잃도록 만듭니다.
3.
『달과 6펜스』에서는 극단적 집착이 단순히 자기 파멸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유산을 남기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스트릭랜드는 파괴가 아니라 창조의 형태로 그 광기를 발휘합니다. 그는 주변을 황폐하게 만들면서 전진한 끝에 한계를 돌파해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경지에 이른 듯 보이지요.
이렇게 생각하면 도취는 광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도취의 대상이 무엇인지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사회의 대다수가 공감하는 가치인 돈이나 명예를 좇는다면 대개 그것은 바람직한 행동이 됩니다. 하지만 스트릭랜드의 예술처럼 독자적이고 개별적인 것을 추구한다면 광기로 여겨지고 소외되기 마련이지요.
보편적인 가치를 좇는 이들은 ‘모범적인’ 시민이 됩니다. 본받을 만한 선례로 취급받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요. 하지만 ‘위대한’ 인물, 스트릭랜드와 같은 위대한 화가가 되는 인물들은 보편적인 가치 바깥에서 나옵니다. 인류의 시야를 넓히고 한계선을 확장하는 인물들이지요. 이런 시야를 넓히는 힘을 갖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힘이 필요합니다.
만약 스트릭랜드가 뭉근한 태도로 “나는 부와 명예도 얻으면서 예술도 하겠어”라고 했다면, 그는 위대한 화가가 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게 스트로브입니다. 스트로브는 예술을 알아볼 수 있는 감수성이 있지만, 그것을 추구할 과단성과 힘이 없지요. 자신의 안온한 생활과 사랑을 포기할 힘이 없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그는 스트릭랜드의 광포한 행보에 상처 입는 신세가 되지요.
그들은 소설 속 인물들이기에 과장된 한 쌍처럼 보이지만, 실제 현실에서도 어느 정도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정말 커다란 직업적 성취를 이루고 싶다면 워라밸이나 가족과의 시간을 어느정도 포기해야 하는 것처럼, 정말 어려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가진 것을 놓아버리는 과단성을 가져야 하는 경우가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달을 좇으면서도 6펜스 동전도 잘 챙기는 인물들이 많습니다. 스트릭랜드처럼 극단적으로 고개가 빠지도록 달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인물은 소설 속에서나 보이는 전형적인 예술가의 이미지에 가깝지요.
하루하루 6펜스 동전을 쫒으며 살다보면, 종종 달을 좇으며 사는 삶이 낭만적으로 보일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삶의 다른 방향을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예술이란 정서의 구현물이며, 정서는 만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이다.
신비주의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보고, 정신병리학자는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을 알아내는 법이다.
내가 여기에서 얻는 가르침은 작가란 글 쓴느 즐거움과, 생각의 짐을 벗어 버리는 데서 보람을 찾아야 할 뿐, 다른 것에는 무관심해야 하며, 칭찬이나 비난, 성공이나 실패에 아랑곳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의 즐거움 아닌 어떤 것을 위해 글을 쓴다면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가 아니겠는가.
그때만 해도 나는 인간의 천성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를 몰랐다. 성실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가식이 있으며, 고결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비열함이 있고, 불량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선량함이 있는지를 몰랐다.
“여자란 기껏 생각한다는 게 그런 것뿐이야. 애정, 그저 언제나 애정이지. 남자가 자기를 버리면 꼭 딴 여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니까. 그래 당신은 내가 여자 때문에 바보처럼 이런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시오?”
고통을 겪으면 인품이 고결해진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행복이 떄로 사람을 고결하게 만드는 수는 있으나 고통은 대체로 사람을 좀스럽게 만들고 앙심을 품게 만들 뿐이다.
예술가가 들려주는 건 하나의 멜로디인데, 우리가 그것을 우리 가슴속에서 다시 들을 수 있으려면 지식과 감수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내가 보기엔, 사랑에 자존심이 개입하면 그건 상대방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기 떄문이야.
사랑은 몰입하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잊어버린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제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자기의 사랑이 끝날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환상임을 알지만 사랑은 환상에 구체성을 부여해 준다. 사랑하는 이는 사랑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면서도 사랑을 현실보다 더 사랑한다. 사랑은 사람을 실제보다 약간 더 훌륭한 존재로, 동시에 약간 열등한 존재로 만들어 준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이미 자기가 아니다. 더이상 한 개인이 아니고 하나의 사물, 말하자면 자기 자아에게는 낯선, 어떤 목적의 도구가 되고 만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너무 가볍게 사용한다. 말에 대한 감각이 없어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함으로써 그 말의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작가는 논리를 갖춘 철저한 악한을 창ㅇ조해놓고 그 악한에게 매혹당한다. 비록 그것이 법과 질서를 능멸하는 일이 될지라도 말이다.
여자는 말이오, 자기에게 해를 입힌 사람은 용서하지. 하지만 자기를 위해 희생한 사람은 용서하지 못 해.
난 그 욕망을 이겨 내지는 못하지만 그걸 좋아하진 않아요. 그게 내 정신을 구속하니까 말야. 나는 언젠가 모든 욕정에서 벗어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내 일에 온 마음을 쏟을 수 있는 때가 있었으면 하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나의 의견을 상대방이 얼마나 존중해주느냐에 따라 상대방에게 미치는 나의 힘을 측정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싫어한다. 그처럼 사람의 자존심에 아픈 상처를 주는 것은 없을 테니까.
우리는 마음 속에 품은 소중한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저하려고 안타까이 애쓰지만 다른 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다.
남녀가 똑같이 사랑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다른 점은, 여자가 하루 온종일 사랑할 수 있는 데 비해 남자는 이따금씩밖에 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날 곳이 아닌 데서 태어나기도 한다고. 그런 사람들은 비록 우연에 의해 엉뚱한 환경에 던져지긴 했지만 늘 어딘지 모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산다.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 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일일까? 그리고 연수입 일만 파운드에 예쁜 아내를 얻은 저명한 외과의가 되는 것이 성공인 것일까? 그것은 인생에 부여하는 의미, 사회로부터 받아들이는 요구, 그리고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