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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by lofi4 2025. 4. 19.

 



민음사
밀란 쿤데라
2025/04/07


1.
주인공인 루드비코 얀은 자신의 농담 한마디로 인해 파멸합니다. 편지에 한 문장을 적었다는 이유로 대학생의 신분을 박탈당하고 탄광에서 노동하는 신세가 되지요. 

처음에는 쿤데라가 이런 부조리한 상황, 농담으로 촉발된 인생의 몰락을 농담이라고 부르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쿤데라는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그림을 그렸습니다. 자신이 주체라고 믿는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대신 분별없는 규칙에 매달리는지를 여러 이야기를 엮어 보여줍니다. 

이는 카뮈의 부조리와 상당히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카뮈의 실존주의에는 신도, '절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주체적인 존재, 무한히 자유롭고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라고 착각하는 인간은 부조리한 세계에 의해 파멸합니다. 이유 없는 재난, 우연한 자동차 사고, 그리고 죽음과 같은 부조리가 인간을 몰아세우지요.  

 

인간은 세계에 질서와 규칙이 있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인생에는 의미가, 세계에는 이해할 수 있는 흐름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카뮈는 그러한 믿음을 '철학적 자살'이라고 일컫습니다. 그의 관점에선 체험할 수 없는 인생의 의미나 만날 수 없는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인생으로부터 도망치는 행위입니다. 

카뮈의 부조리처럼, 루드비코와 세계의 관계는 부조리합니다. 루드비코가 몰락한 계기도 부조리하며, 그가 원했던 사랑도 부조리합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벼르던 복수는 우스꽝스러운 꼴로 결말을 맺지요. 이 이야기 전체가 통째로 하나의 농담이 됩니다. 

언뜻 보면 루드비코는 세계 속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세상과 마주하는 대신 끊임없이 도피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는 몰락한 자신의 세계와 마주하는 대신 사랑으로 도피하려 하고, 그것이 실패한 후에는 과거로 도피하려 합니다. 그는 모든 것이 실패한 뒤, 결말부에서 자신의 현실과 마주하게 되는 인물이지요. 그는 타인이나 과거로 도피하며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자신이 인생의 주인공이라 믿으며,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지요.

쿤데라는 이 간극, 인간의 비대한 자의식과 세계 사이에 있는 아이러니를 ‘농담’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치 사마귀가 수레 앞에서 앞발을 들고 자신이 수레를 멈춰 세울 수 있다고 믿는 꼴처럼, 비극적이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농담이지요. 헬레나, 야로슬라프, 루치에와 같은 인물들이 보여주는 농담도 생각할 여지가 많았습니다. 


여러모로 재밌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나는 하느님의 견습 석공이 아닌 걸요. 게다가 만일 하느님의 석공들이 이 세강에다가 진짜 벽으로 건물을 짓는다 해도 우리들의 파괴가 그 건물들에 해를 입히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겁니다. 한데 내가 보기엔 어디 가나 벽은 없고 무대장치뿐이에요. 무대 장치들을 파괴하는 건 아주 올바른 일이지요. 

이 세월동안 시간은 그녀의 진짜 윤곽을 가리는 가면을 새겨 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가면에는 구멍이 두 개 있어서, 그 구멍으로 실재하는 그녀의 진짜 두 눈, 내가 예전에 알았던 그대로의 두 눈이 다시 이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과 내가 다른 점은 나는 언제나 사랑을 찾아다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잘못 생각했다 싶으면, 찾던 곳에서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면, 소름 끼쳐하며 돌아서서 다른 곳으로 가곤 했던 것이다, 나의 이 철없는 사랑의 꿈을 모두 잊어버리는 일이 얼마나 간단한 것일지 잘 알았는데...

사람은 언제나, 무엇보다도, 다가갈 수 없는 것을 강렬하게 욕망한다, 그에 얼굴에 서린 서글픔이 내 안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마지막 얼굴이 진짜였을까? 
아니다. 모든 것이 진짜였다. 위선자들처럼 내게 진짜 얼굴 하나와 가짜 얼굴 하나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는 젊었고, 내가 누구인지 누가 되고 싶은지 자신도 몰랐기 때문에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나의 내면은 마치 방처럼 휙 청소가 되고 어떤 사람이 거기에 살게 되었다. 

우리는 역사라는 말 위에 올라탔다는 데 취했고, 우리 엉덩이 밑에 말의 몸을 느꼈다는 데 취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결국 추악한 권력에의 탐욕으로 변해 버리고 마는 것이었지만, 그러면서도 거기에는 동시에 아름다운 환상이 있었다. 사람이 이제 역사의 바깥에 머물러 있거나 역사의 발굽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를 이끌어 나가고 만들어 나가는 그런 시대를 우리, 바로 우리가 여는 것이라는 그런 환상이 있었다. 

쓰디쓴 풀을 자꾸 다시 씹어보는 것이 즐거워서가 아니라 머릿속 생각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게 집요한 법이어서, 나는 여러 번 내 사건의 변형판들을 만들어 내어 추방이 아니라 교수형이 제안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해 보곤 했다. 

어찌 됐거나 젊은이들이 연기를 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 놓는다. 그러니 그들은 허겁지겁 이런저런 형식과 모델들, 당시 유행하는 것, 자신들에게 맞는 것, 마음에 드는 것 등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그리고 연기를 한다. 

도대체 어째서 나는 어른으로 심판받고 추방되고 트로츠키주의자라고 선언되고 탄관으로 보내지고 그렇게 모든 데에서 어른이어야 하면서 사랑에서만은 어른이 될 권리도 없고 이렇게 미숙해서 모든 창피를 감수해야 한다는 말인가? 

모욕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삶 앞에서 자신의 태도를 완전히 뒤집어 버릴 수 있는 것인가?

사실상 내가 한 여자에게서 좋아하는 것은 그녀 자체가 아니라 그녀가 내게 다가오는 방식, 나에게 그녀가 의미하는 그 무엇이다. 나는 한 여자를 우리 두 사람 이야기의 등장인물로서 사랑한다. 

삶은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우리에게 말을 하고 점진적으로 어떤 비밀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믿음, 삶은 해독해야 할 수수께끼로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믿음, 우리가 겪는 일들은 동시에 우리 삶의 신화를 현성하며 또한 이 신화는 진실과 불가사의의 열쇠를 모두 지니고 있다는 믿음. 그것은 환상일 뿐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주 그래 보이기까지도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해독해야만 하는 이런 욕구를 억누를 수가 없다. 

여자의 생각을 다루는 데에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나름의 규칙이 있는 법이다. 이성으로 여자를 설득하려 하거나, 아주 합리적인 근거를 들어 여자의 의견을 반박하거나 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 여자가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파악하고, 우리가 바라는 그녀의 행동과 그 이미지가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일이다. 

당신은 인류 전체를 절대 용서하지 않았어요. 그때 이래로 당신은 인류에게서 믿음을 거두어 버렸고 증오를 퍼붓고 있어요. 내가 당신을 이해는 할 수 있다 해도, 사람들에 대한 그런 식의 증오는 끔찍한 것이고 죄악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 증오는 당신의 저주가 되어 버렸어요. 아무도 용서되지 않는 세상, 구원이 거부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지옥에서 사는 것과 같으니까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어떠한 위대한 운동 앞에서도 조소와 우롱이 용납될 수 없다는 것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을 부식시켜 버리는 녹이기 때문이지요. 

자기 밖에 놓인 수수께끼에 관심을 가지기에는 스스로에게 자신이 너무나 커다란 수수께끼인 그런 나이, 또한 다른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감정, 자신의 혼란, 자신의 가치 등을 놀랍게 비추어 주는 움직이는 거울에 불과한 그런 바보 같은 서정적 나이에 대한 분노였다. 그렇다, 나는 지난 십오 년 동안 루치에를 예전 나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는 거울처럼 생각해 왔던 것이다. 

내게는 언제나 너무도 현대적이고 생생한 그와 나 사이의 투쟁위로 모든 것을 잠재우는 위무의 물결이 파도처럼 덮쳐 오는 것을 나는 보았다. 시간의 물결,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모든 시대들 사이의 차이들마저 다 씻어 가 버리는데, 하물며 보잘것없는 두 개인 사이의 차이는 얼마나 쉽게 씻어 가겠는가. 하지만 나는 시간이 가져다주는 모든 화해의 기회에 맞서 맹렬하게 저항하였다. 어쨌거나 나는 영원성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복수하고자 했던 나의 과거, 그러나 여기서 마주쳤는데도 마치 나를 알지도 못한다는 듯이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가 버린 나의 과거, 그 과거 전체가 나에게 보여 준 것과 동일한 그런 차가운 무관심. 

이런 실수들은 너무도 흔하고 일반적이어서 세상 이치 속에서 예외나 '잘못'도 될 수 없고 오히려 그 순리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잘못한 것이란 말인가? 역사 자체가? 그 신성한, 합리적인 역사가? 

그리고 만일 역사가 장난을 한다면?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이, 그리고 내 인생 전체가 훨씬 더 광대하고 전적으로 철회 불가능한 농담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상, 나 자신의 농담을 아예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 대부분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고쳐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 

내가 이 세계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 아침, 이 세계를 초라한 모습으로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아주 쓸쓸한 모습으로. 이 세계는 화려한 치장과 광고로부터 버림받았고, 정치적 선전으로부터, 사회적 유토피아들로부터, 문화 담당 공무원 집단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이 세계는 내 세대 사람들의 열정에 찬 지지로부터 버림받았고 제마네크로부터도 버림받았다. 이런 고독 속에서 이 세계는 정화되었다. 나에 대한 꾸짖음으로 가득한 이 고독은 마치 얼마 살지 못하는 사람과 같은 이 세계를 정화했다. 그 고독은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최후의 아름다움으로 이 세계를 눈부시게 빛나게 하고 있었다. 이 고독이 그 세계를 나에게 되돌려준 것이었다. 

루치에와 나, 우리는 유린된 세계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그 세계를 불쌍히 여길 수 없었던 까닭으로 우리는 거기에 등을 돌렸고, 그리하여 그 세계의 불행과 우리 자신의 불행을 다 같이 악화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그 이후의 삶은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진 삶, 열정적 헌신도 없고 악단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는 일도 없어져 버린 삶, 인생의 후반부, 패배 이후의 후반부가 될 것이라고. 그리고 우리 운명은 죽음보다 훨씬 이전에 끝나는 일도 종종 있다는 생각, 종말의 순간은 죽음의 순간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야로슬라프의 운명은 이제 그 끝에 이미 도달한 것이라는 생각이 엄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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