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천명관
2024.06.22
인칭과 문체
이 소설의 화자는 마치 장터에서 이야기를 팔던 전지전능한 이야기꾼처럼 서술합니다.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한 구어체로 이야기를 풀어내며, 과장된 표현과 적극적인 인물 평가가 이야기 속에 곳곳에 배치되어 있지요. 특히 무게를 과장하는 묘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춘희가 돌도 되기 전에 30kg이 넘었다든가, 걱정이 살찐 고래와 같을 때 1톤에 이르렀다는 부분 등이 그러합니다. 이는 이야기를 부풀리며 청중을 끌어들이는 장터의 이야기꾼 같은 느낌을 주며, 독자는 이 구어체적 서술 덕분에 이야기의 청자로서의 입장을 취하게 되지요.
이러한 서술 방식은 특정 인물의 삶에 몰입하기보다는 그 인물의 사건을 거리감 있게 따라가게 만듭니다. 때문에 독자는 인물의 감정을 세세하게 느끼기보다는 사건의 인과관계에 집중하게 되지요.
반복되는 줄거리
이야기의 줄거리는 마치 노래의 1절과 2절처럼 반복됩니다. 노파와 애꾸, 금복과 춘희. 이 두 축은 같은 구조를 지닌 듯 보이면서도 조금씩 다르게 변주됩니다. 노파와 금복은 자신의 욕망에만 몰두하며, 타인과의 관계에서 실패하며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하지만 실패한 노파와는 다르게 금복은 자신의 욕망을 현실에서 구체화하며 벽돌공장과 평대다방을 세우고, 고래극장이라는 꿈을 실현합니다. 금복은 외모를 남성적으로 바꾸면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듯 보이지만, 그녀의 과거는 지워지지 않습니다. 칼자국과 아버지에 얽힌 죄책감은 끝내 그녀를 괴롭히는 원령이 되어 그녀를 집어삼킵니다.
과거의 극복에 대하여
과거는 극복되어야 하지만, 이미 저지른 과오는 씻어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요? 금복이 과거를 극복할 수 있었던 다른 길은 없었을까요? 만약 춘희를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증거가 아니라 딸로서 돌보았다면? 애꾸가 바라던 대로 재산의 반을 나누어 주었다면? 혹은 처음부터 노파의 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이러한 질문들이 끝없이 반복되지만, 답은 쉽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처럼 무릎 꿇고 속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에는 사랑으로 우리를 기다려주는 소냐 같은 존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과거와 화해하고, 현재를 살아갈 수 있을까요? 노르웨이의 숲에서 와타나베가 방랑 끝에 미도리의 이름을 불렀듯, 우리도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야 할까요?
금복의 실패와 춘희의 순수
금복의 실패는 과거를 지우려는 적극적인 행동에서 비롯됩니다. 큰 사업을 이끌고,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불꽃처럼 타올랐지만 결국 그 불꽃은 자신을 태우고 말았습니다. 과거와 단절하려 했던 시도는 성공적으로 보였지만, 힘이 소진된 후 남은 것은 추레한 과거의 망령뿐이었습니다.
반면 딸 춘희에게는 극복할 과거가 없습니다. 그녀는 그저 벽돌공장의 풍경을 다시 불러오고 싶어할 뿐이지요. 세상의 비극 속에서 자신의 내면으로 가라앉아 벽돌을 만들며 살아갑니다. 금복과는 다르게 춘희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무능력은 역설적으로 수많은 벽돌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고, 그녀를 광대한 성간까지 끌어올리는 힘이 되었습니다.
노르웨이의 숲과 고래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읽었던 책이 노르웨이의 숲이라 그런지, 고래를 읽으면서 노르웨이의 숲이 자주 생각났습니다. 금복의 모습을 보면서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나오코가 겹쳐보였습니다. 고래에는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내가 해온 행동, 과거가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든다면, 과거와의 단절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지요. 금복처럼 새로운 곳으로 떠나고, 남장을 하고, 이사를 한다 해도 나는 여전히 나일 뿐입니다.
금복과 나오코는 다르면서도 비슷합니다. 나오코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금복은 여자로서의 매력과 능력으로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했다는 점이 다르지요. 하지만 결국 둘 다 과거에 붙잡혀 현실을 살아갈 힘을 잃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마무리하며
많은 소설에서 과거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현실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을 제시합니다. 과거에 집착하거나 복수를 꿈꾸지 않고, 그저 남아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하지만 과연 그것이 현실에서 가능한 일일까요? 금복의 실패는 과거를 잊으려는 그녀의 몸부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처럼 예언을 피하려는 행동으로 자기도 모르게 예언을 실현하고, 스스로 파멸했지요.
반면 춘희는 세상에서 고립된 채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순수하게 살아갑니다. 그녀의 무능력은 그녀에게 '현실을 충분히 살아가는 것' 이외의 선택지를 주지 않았고, 그녀는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걷지요. 저는 그 모습이 퍽 쓸쓸해보였습니다. 최후에 성간으로 승천하는 모습은 거의 작가가 춘희에게 불행한 삶을 준 대가로 주는 위로처럼 보였을 정도로요.
운명의 잔혹한 모습을 한국 근현대의 모습에 풀어낸 이야기였습니다. 즐겁게 읽었으나 읽기 힘든 부분이 종종 있었습니다.
밑줄 그은 문장
다른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그녀의 특별한 재능은 바로 그런 한없이 평범하고 무의미한 것들, 끊임없이 변화하며 덧없이 스러져버리는 세상의 온갖 사물과 현상을 자신의 오감을 통해 감지해내는 것이었다.
더구나 춘희가 걱정의 씨라는 것을 안 이후로는 아이를 더욱 멀리했다. 걱정은 한때 자신이 온몸을 바쳐 사랑한 남자였지만 그것은 무지와 혼돈, 식탐과 어리석은 만용, 비극과 불행의 또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훗날, 춘희는 끝내 세상에 자신의 골동품적인 유전형질을 남기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춘희는 자신의 인생을 둘러싼 비극을 얼마나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그녀의 육체는 영원히 벗어던질 수 없는 천형의 유니폼처럼 단지 고통의 뿌리에 지나지 않았을까? 그 거대한 육체안에 갇힌 그녀의 영혼은 어떤 것이었을까? 사람들이 그녀에게 보여줬던 불평등과 무관심, 적대감과 혐오를 그녀는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었을까? 혹, 이런 점들에 대해 궁금증을 가진 독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 이야기꾼이 될 충분한 자질이 있다. 왜냐하면 이야기란 바로 부조리한 인생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뭔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만이 세상을 쉽게 설명하려고 한다. 그들은 한 줄 또는 두 줄로 세상을 정의하고자 한다. 예컨데, 다음과 같은 명제가 바로 그런 것이다.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가쁘게 굴곡졌던 영욕과 성쇠는 스크린이 불에 타 없어지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아이러니로 가득찬, 그 혹은 그녀의 거대한 삶과 함께 비눗방울처럼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