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26

좀머씨 이야기 열린책들파크리트 쥐스킨트2023/07/29소설은 두 갈래의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끊임없이 걸음을 재촉하는 좀머씨와, 자라나는 소년인 주인공의 이야기지요. 좀머씨의 발걸음은 메트로놈같은 발걸음으로 시골 마을을 정처없이 걷습니다. 소년은 키가 키가 1미터밖에 되지 않는 시절, 나무에 재빠르게 오르고  낡은 자전거를 어줍잖게 타며 성장합니다. 노란 원피스를 입은 흑발 단발머리 여학생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엄격하고 늙고 히스테릭한 퐁텐부인에게 피아노를 배우며 무섭게 혼나고, 그래서 자살하려고 나무 위에 올라갔다가 좀머씨가 멈춰서서 빵을 먹는 것을 목격하지요. 그렇게 소년은 성장하고 시간은 흐릅니다. 그 와중에도 좀머씨는 계속 계속 걸어다니고 있지요. 소년의 삶과 좀머씨의 삶은 스치듯 교차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 2024. 11. 21.
사양 민음사다자이 오사무2023/09/09 체호프의 단편, 벚꽃 동산을 모티프로 다자이 오사무가 쓴 사양입니다. 저물어가는 해와 같이 몰락해가는 한 귀족 가정의 이야기를 쓰고 있지요.  주인공, 장녀 가즈코는 나약합니다. 부드럽고 유순하면서도 자신의 저속한 생각에 자괴하고, 어머니를 정성껏 돌보면서도 그녀를 위해 산골에 틀어박힌 자신의 삶을 떠나고 싶어하지요. 쓸쓸하고 나약합니다. 남동생이 전쟁에서 돌아옵니다. 마약중독자가 된 그는 그녀와 어머니를 괴롭히지요. 술과 마약을 빠져 집안의 돈을 탕진합니다. 안 그래도 기울어져가는 가세에 도움을 주지 못할 망정, 오히려 더욱 불을 지르지요. 하지만 본인도 그 쾌락을 즐기지 못합니다. 어머니와 가즈코를 더욱 괴롭게 만들면서 스스로도 괴롭게 만들지요. 어머니는 우아하지.. 2024. 11. 20.
물고기 사회 미우 판판야2023/11/16 이 책, 물고기 사회의 가장 메인 스토리는 물고기들이 진화하여 어항을 사들이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제게 가장 인상깊게 남은 작업은 카스텔라풍 찜케이크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판판야는 '카스텔라풍 찜 케이크'라는 편의점 빵에 매료되어 그 빵을 구하러 다니는 여정을 만화로 남겼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편의점 빵이라는 건 그다지 굉장한 건 아닙니다. 유멩 제과점에서 갓 구운 따끈따끈한 빵도 아니고, 그저 공장에서 만들어져 편의점에 진열된 평범한 빵이지요. 거기에 무슨 매료될만한 장점이 있을까요? 아무리 맛있어봐야 고작 편의점 빵일텐데요.하지만 이 이야기가 가진 매력은 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판판야가 '카스텔라 풍 찜케이크'에 매료되어 빵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일련의 과정에 .. 2024. 11. 19.
공터에서 해냄 김훈 2023.09.10 마씨 집안을 따라 줄거리가 진행되는 서사때문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배경이 한국 근현대인만큼 훨씬 가깝게 느껴졌고, 마동수, 마장세, 마차세는 한 번쯤 스쳐갔을법한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문장은 예리했고 시대는 숨을 쉬었습니다.  고물사업을 하며 사기로 큰 돈을 벌다가 잡혀서 몰락을 맞게 되는 마장세. 하지만 그들은 가장 사업이 활황이던 순간조차도 그리 행복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경찰에게 수배되고, 구속되었을 때도 옷을 갈아입는 것 마냥 모습이 변했다는 느낌 뿐 몰락이라는 감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제목 그대로, 인물들은 공터에 덩그러니 버려진 것 같습니다. 비빌 언덕 하나 없이 제 구멍을 제가 파고 들어가 스스로를 .. 2024. 11. 18.
고래 문학동네 천명관 2024.06.22 인칭과 문체이 소설의 화자는 마치 장터에서 이야기를 팔던 전지전능한 이야기꾼처럼 서술합니다.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거는 듯한 구어체로 이야기를 풀어내며, 과장된 표현과 적극적인 인물 평가가 이야기 속에 곳곳에 배치되어 있지요. 특히 무게를 과장하는 묘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춘희가 돌도 되기 전에 30kg이 넘었다든가, 걱정이 살찐 고래와 같을 때 1톤에 이르렀다는 부분 등이 그러합니다. 이는 이야기를 부풀리며 청중을 끌어들이는 장터의 이야기꾼 같은 느낌을 주며, 독자는 이 구어체적 서술 덕분에 이야기의 청자로서의 입장을 취하게 되지요.이러한 서술 방식은 특정 인물의 삶에 몰입하기보다는 그 인물의 사건을 거리감 있게 따라가게 만듭니다. 때문에 독자는 인물의 감정.. 2024. 11. 18.
이반 일리치의 죽음, 광인의 수기 열린책들 톨스토이 2023.09.05 이반에게는 인간보다 거대한 죽음을, 예브게니에게는 인간보다 거대한 성욕을, 세르게이에게는 인간보다 거대한 신앙을.  고위 관료인 이반 일리치에게는 부족할 게 없었습니다. 존경받는 판사였고, 두 아이의 아버지였으며, 넉넉한 연봉을 받는 남자였지요. 하지만 그가 점점 죽음으로 향하면서 쇠락해가는 과정은 지독합니다. 의사들은 그에게 조각같은 희망을 보여주면서도 그를 낫게하진 못하고, 주변의 인물들은 뒤에서 그가 죽은 후를 미리 준비하면서 앞에서는 그가 병이 곧 나을 것처럼 거짓말을 합니다.  그는 삶이 찬란했었기에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거대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커튼을 설치하다 옆구리를 부딫힌 것이 자신의 죽음의 원인이라는, 그 어이없는 죽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2024. 11. 18.